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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Oct 15. 2018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대체 그 놈의 커리어가 뭐길래

퇴사하고 나서 약 3개월 정도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다. 이직은 무슨 그냥 놀자! 쉬자! 하면서 엄마랑 여행도 다녀오고 매일 나가 핫플레이스 찾아다니며 놀았다. 아니 노는 게 이렇게 재밌어? 라고 생각했고 노는 게 지겨워질 때쯤 취업하면 되겠지 라고 그 때만 해도 아주 쉽게 생각했다.


그리고 8월, 모아둔 돈까지 탈탈 쓰고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오라고 한 회사가 두 곳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포지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가고 싶은 회사가 두 곳, 둘 다 1차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최종까지 합격한 곳이 생겼다. 배부른 소린 줄 알지만 내키지 않았다. 헤드헌터가 밀어부치는 바람에 입사 예정이 되었지만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 커졌고 급기야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9월 취업 준비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10월 안에 되는 곳은 어디든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막상 최종 합격하고 나니 취업이 하기 싫은 건지, 회사나 포지션이 마음에 안드는 건지, 이제는 나도 나를 모르겠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TV광고를 보며 에이전시 입사를 재고려해볼 정도로 머릿 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답은 정해져 있고 난 대답만 하면 돼?


친한 친구에게 결국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날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 답정너 아니냐는 말이었다. 결국 갈 거면서 생각만 많은 거 아닐까, 왜 갑자기 가기 싫은 걸까? 하는 이야길 정말 많이 했다. 가장 궁금했던 건 단순히 다시 회사에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싫은 건지, 아니면 그 회사를 가고 싶은 게 아닌지였다. 그리고 며칠동안 생각해보니 이 회사에서 쌓은 커리어로 내 꿈의 직장까지 갈 수 있을까? 하며 머릿 속으로 계산만 느는 것이다. 에이전시 면접에 합격했을 때 당당하게 브랜드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브랜드에 합격했을 때는 “여기보다 더 좋은 브랜드 포지션도 있을 거야”하고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다. 특히 헤드헌터에게 포지션 제안을 받을 때도 늘 했던 말, 좀 더 큰 곳부터 지원해보고 싶어서요. 더 큰 곳이 뭐길래. 그 놈의 커리어가 대체 뭐길래!


그럴 때면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너가 거기 말고 더 올라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었냐고. 하루에 하나씩 이력서를 넣어봤어? 아니면 어학 시험 점수 높이려고 공부를 했어? 그냥 쉬는 동안 놀았을 뿐이잖아. 경력은 거기서 머물러있고 쉬는 동안 니가 하고 싶은 거 하며 놀았는데 더 높은 곳을 원하는 거 자체가 아이러니하지 않냐고. 묵직하게 한 방 맞고 나서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 뒤론 이력서를 한 동안 굉장히 열심히 썼다. 그랬지만 결국 내 인생에서 꿈의 포지션 두 개를 날려먹었지.


첫 퇴사, 첫 이직을 경험하며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무슨 일을 해야하지? 였다. 처음엔 막연하게 브랜드에서 마케팅을 하고 싶었고, 이후엔 무슨 브랜드에 가고 싶은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앞으로 내 인생에 남을 커리어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했다. 그냥 다녀봐! 뭐든 경험이 되겠지! 라는 부모님 말씀도 있지만, 결국 내가 다녀야하고 내 인생이 될테니까 선택하게 되면 책임은 내가 지는 거니까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닌 것 같은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래봤자 어차피 다 똑같은 회사일 뿐인데, 내가 커리어를 그렇게 중요시 했던 사람이었나? 신입때는 붙여만 주십쇼! 라는 자세로 임했던 나였는데, 그랬던 나는 대체 어디간거야?


전 회사를 퇴사한 걸 후회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아니, 난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떤 회사를 간다고 해도 일을 한다는 점은 똑같을 것이다. 그저 같이 일하는 사람이 달라지고 일해야하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 말고는 또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겠지. 회사에서 무슨 꿈을 찾고 자아 실현하겠다고 재고 있어. 뭐 그렇게 대단한 커리어를 쌓겠다고 요새도 취업이 어렵다고 하는데 나 혼자 배부른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근데도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또 다른 회사를 꿈꾼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꿈의 직장은 그 어느 곳에도 없다는 걸 알면서. 이직하면 사고 싶은 거 실컷 사고 매주 복권이나 열심히 긁어야겠다. 우선은 회사를 다녀야 할 명분을 만든 후, 돈많백의 꿈을 위해. (*돈많백=돈 많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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