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남들 다 하는 평범한 결혼식을 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고 한복을 입고 폐백을 했다. 대여한 웨딩드레스는 반납을 했지만 한복은 나에게 남았다. 그렇지만 명절에도 한복을 입지 않았던 터라 자연스럽게 내 한복은 상자 속에 고이 담겨 장롱 깊숙이 잊혔다.
한복의 존재를 다시금 깨닫게 된 건 말레이시아에 오기 위해 이삿짐을 정리하면서였다. 해외에서 필요가 있겠어라는 마음이 들어 아이들 돌반지와 함께 시부모님께 맡기고 왔다. 그때의 나에게 한복은 아주 비싸고 소중하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물건이었다.
한국에 남겨진 내 한복은 다시 한번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그런데 첫째 아이가 국제학교에 입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정말 몰랐다. 국제학교에 아이가 다니면 엄마가 한국의 명절이나 전통을 알리는 사람이 된다는 걸.
설날과 추석이면 다른 한국엄마들과 함께 한국의 명절을 소개하는 행사를 했다. 중국과 겹치는 명절이라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중국엄마들은 간단하게라도 꼭 준비를 하던 터라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심지어 각 나라의 문화를 알리는 행사 때는 춤도췄다. 덕분에 평생 안 하던 딱지도 접어보고 한국 간식도 나눠주고 탈춤도 춰봤다.
이런 행사를 하면서 한복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막연히 굉장히 덥고 불편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복 스타일의 앞치마를 했다. 한국에서 개량한복도 샀다. 슬프게도 이 개량한복은 너무 두껍고 막상 입으니 예쁘지가 않아서 제대로 활용을 못했다. 아깝다.
마지막 추석행사만큼은 제대로 된 한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이때까지도 내 한복은 내 머릿속 구석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친한 언니의 한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엄청 불편할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입었는데 좀 덥긴 했지만 입을만했다. 오히려 오랜만에 입는 한복이 정말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복을 입어야 하는 행사가 한 게 더 있었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함께 강강술래를 춰야 하기 때문에 꼭 제대로 된 한복이어야 했다. 추석 때 빌려준 언니와 함께하는 행사여서 그 한복을 또 입을 순 없었다. 그렇지만 그저 누군가에게 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 하는 중고샵에서 무료로 한복을 빌려준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한복이 여기에 오고 싶어서 그랬던 건지 도저히 빌릴 수가 없었다.한복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중고샵도 갔지만 도저히 내가 입을 만한 건 없었다. 행사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초조해져 갔다. 그러다 문득 내 한복이 생각났다.
이때가 9월 18일이었다. 9월 27일 행사날에 맞춰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없었지만 일단 항공택배를 알아봤다. 시부모님 댁에서 한국의 항공택배 집하장으로 이틀 안에 보낼 수만 있으면 괜찮을 거 같았다. 그런데 추석기간이라 픽업 서비스가 안 되는 거였다. 좌절하다가 순간 집하장과 시부모님 댁과의 거리를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차로 30분 거리! 이걸 왜 이제 알았지?
어머님은 그다음 날 아침 바로 택배회사 집하장으로 가셨고 토요일에 우리 집으로 배달이 왔다. 정말 감사했다. 7년 만에 본 내 한복은 정말 예뻤다. 사실 내 한복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고 있었다. 엄청 촌스럽고 불편하겠다는 내 짐작은 틀렸다. 화사하고 곱기만 했다.
첫째의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주던 날 한복이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두고두고 남을 사진 속에 예쁜 첫째와 고운 옷을 입은 내가 있으니 기쁘다. 한 브라질 엄마는 한복이 너무 예쁘다며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인스타에 올렸다. 내 한복이 브라질 사람의 인스타에 올라가다니 덕분에 신기한 추억이 생겼다. 12월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곳에서 한복이 필요한 행사는 정말 마지막이다. 이제라도 내 한복을 입어서 다행이다. 한국에선 명절 때라도 입도록 해야겠다. 장롱 속에만 묻어두기엔 정말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