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는 어쩌자고 그렇게 처절한 사랑 얘기를 하는가
우리 동네 고깃집에 그자가 참하게 앉아 있었다. 12월 초, 숯불을 피우니 개시한 코트는 입고 오지 말고 빨기 직전의 가을 옷을 입고 오라는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더니 진짜 바람막이를 입고 왔더라. 지글지글 고기를 굽고 술도 한 잔 마시고 그자의 망한 소개팅과 망한 썸을 연이어 얘기하며 위로랍시고 나의 망해먹은 연애를 축약해 줄줄 읊으며 그럴 수도 있다고 위로했다. 세상 제일 맛있는 술자리는 망한 연애를 안주삼아 썰을 풀 때다. 서로의 망해먹은 썸과 연애를 줄줄 읊어대니 차가운 초겨울 바람에 술은 맛있고 고기도 맛있고 얘기도 맛있다.
원래 세상 제일 재밌는 게 내 얘기하는 자리인데 주변 친구들 지인들은 어지간해선 다 아는 얘기라 다시 읊기는 좀 그렇다. 익숙한 사람들과 쌓아온 시간을 두고 다 알아서 서로 배려하는 사이도 편하고 좋지만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을 때 인생사 축약판을 쭈욱 읊는 것도 꽤 즐겁잖아? 그게 또 말을 주거니 받거니 잘 맞는 상대라면 얼마나 재미나는지 말이다. 그자는 대화가 꽤 즐거운 사람이었다. 친구 동창 지인들 어지간히 다 떨어져 있고 회사도 별반 다르지 않아 새로운 사람이 귀하던 즈음이다. 왠지 좀 아쉬워서 우리 동네 새로 생긴 스페인 와인집이 있다 거기 갈래요 했더니 그자가 넙죽 콜! 했다.
평일 동네 술집에서 같이 한 잔 할 수 있는 동네 술친구, 삼대가 덕을 쌓아야 얻을 수 있다는 유니콘 같은 존재. 평일에 만나는 술친구는 또 얼마나 귀하냔 말이다. 거기다 쏘맥을 말아먹고 2차로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흔치는 않다. 아 그자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했다. 평일에 술을 마시는데 얘기가 너무 찰지게 재미나서 오랜만에 꽤 즐거웠다. 일단 허물을 까고 시작한 자리라 못 나올 얘기가 없었고 취미 일상사 줄줄줄 이어져 생각보다 꽤 재미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오랜만에 말 통하는 재미난 술친구였다. 오랜만에 흥이 올라 나의 개드립은 끝이 없었고, 오지랖은 차고 넘쳤으며, 주제도 영화부터 술까지 온갖 종류를 얕게 훑으며 쌓아온 잡설을 끝없이 풀어내고 있었다.
얘기는 흐르고 흘러 영화 [봄날은 간다]에 닿았다.
허진호!!!
그자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얘기했다. 아 이건 흔한 말로 각자의 인생영화였다. 얘기를 하다 마디점프 하듯이 급 친해지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새삼 사람이 다시 보이고 급 친해지는 기분이었다. 대학 때 교양 레포트로 허진호 감독의 두 영화를 연결해 쓴 적이 있다는 얘기까지 했다. 오래되고 낡아 궁상맞을 수도 있는 그 다정하고 세세한 영화 속 순간순간을 나의 봄날과 당신의 8월을 번갈아 얘기하며 그 정서를 한 없이 떠들었다. 그자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오늘 술이 참 맛있구나 하며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톡톡톡~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자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다른 손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아니 왜 끼를 부리시나?
약간의 경험치에 기댄 편견이 있다. 책 좀 읽었다 하고 영화 좀 봤다 하는 남자사람은 일단 거르고 보는 게 좋다. 그들의 세계관은 제한적으로 아름답고 스스로에게만 관대하고 말랑해서 연애상대가 된 순간 내 살에 내 손으로 소금치고 파 먹히는 꼴이 된다. 쓸데없이 감성적이고 유약한 정서를 지난 남자들이 술 먹고 말하는 시적 허용에 순간 혹하지만 대체로 끝이 나쁘다. 말이 되는 상대를 찾다가 그런 글러먹은 것들과 연애를 하고 사랑에 빠졌다 살만 파 먹히면 다행인데 그 사랑이 끝나고 정신줄을 거의 놓았다 회복에 시간이 꽤 걸렸다. 연애도 결혼도 다 시들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자에 대한 기대치가 하나도 없었다. 어쩐지 혹해서 마음이 가고, 혹시나 연애를 염두에 둔 사람도 아니었던지라 디테일하게 관찰하며 괜한 신경 쓸 상대도 아니었다.
아니 근데 왜 끼를 부리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