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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Apr 09. 2024

운명적인 것

토지 5부 2권, 통권 17권

제2편 운명적인 것. 책을 덮고 다시 한번 제목을 들여다봤다. 운명이란 기이한 둘레로 묶인 사람들. 원하지 않았으나 어느새 원하고 떠날 수 없는 관계, 사이, 그 속의 사람, 사람들. 기어이 만나 재회하지만 미약한 희망을 걸고 재회를 약속하는 오가타와 유인실. 운명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운명이라 이름 지워지는 것들은 어째서 보이지 않는 줄을 그은 듯 슬픈 그림을 한 몸처럼 등에 지고 걸어가는가. 그래서 더 운명일까. 사는 일 참 얄궂다.      


그 순간 인실은 막연했던 것이 손에 꽉 잡히는 것을 느낀다. 고아원에 가지 않았고 이름 모를 남의 손으로 건너가 생사조차 모르게 되지도 않았고 조찬하가 아이를 길러주었다는 사실, 그것이 얼마만 한 축복인가를, 인실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없이 흘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아있다는 것도. 183p.     


아이를 버리고 떠난 운명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았던 유인실, 쇼지를 사랑하지만 전쟁을 목전에 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돌아서는 오가타. 침략국과 지배국의 사람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인실과 오가타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둘은 거스를 수 없는 인연도 운명이지만 내 나라의 운명을 버릴 수 없는 것도 운명이었다. 인실의 선택과 오가타의 선택은 각자의 기로에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내 나라가 망해야 사랑하는 인실도, 아들 쇼지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오가타의 운명도 가혹하긴 매한가지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며 살았던 오가타의 인생에도 약속이 생겼다. 세계주의자라 한들 침략자 조국의 운명이 쉬울까. 그의 행복은 내 땅의 파멸과 등 돌린 궤를 걸어야 하는 것.      


“네, 그래요. 전쟁이 끝나고 인실 씨를 만날 수 있다면, 두사람이 살아남았다면 그 사람과 내 아들을 끌고 나는 북국으로 갈 겁니다. 빙하를 건너서요.” 224p.      


중국 설화에 인연인 두 사람의 손 끝 에는 붉은 실이 걸려있다고 한다. 언제고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번 권을 읽으며 그 설화를 자주 생각했다. 스쳤으나 타고난 신분적 한계를 눈앞에 두고 비슷한 운명으로 마주하는 영광과 양현. 운명이라는 건 어쩌면 체념의 끝에 마주하는 자각일까. 자기 인식의 시작점일까. 도저히 내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얼마나 아득한 것인가.      


언제나 그랬지만 가슴이 설렜다. 어디든 떠난다는 것은 새로움 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마치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폐쇄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서는, 그것은 신선한 해방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낯섦이며 여행은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겨울새같이 외로운 것, 어쩌면 새로움은 또 하나의 자기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마주치는 사물과 자신은 전혀 무관한 타인으로서 철저한 또 하나의 소외는 아닐는지. 242p.       


눈을 감아도 거둘 수 없는 마음을 영광과 양현은 이미 알고 있다. 백정의 자손이란 신분의 굴레에서 한 발 물러섰지만 벗어날 수 없는 영광과 아무리 서희의 품에서 귀하게 길러졌지만 결국은 기생의 딸이라는 그 한계점을 인식하고 있는 양현.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각자의 그늘을 서로는 알아본다. 밝은 세계를 걸어도 언제나 한 발 멀리 그늘 아래서 저 멀리를 바라보는 듯한 경계인들. 겪어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서늘한 어떤 한계, 그림자가 닮은 사람들은 그늘 아래서 쉽게 마음을 허물어 버린다. 그 틈으로 스며드는 연민 조금 더 나아가는 마음. 결국, 사랑.      


운명으로 묶여진 네 사람을 생각해 본다. 각자 상처를 가진 저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말도 생각도 문장으로 맺어지지 않고 말줄임표처럼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명확하게 ‘~하다’ 하며 마침표를 찍기 어렵다. 마음이 맴돌 듯 말도 마음 안에서 자꾸 빙글빙글 돈다. 앞서 서희와 길상을 생각하며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가졌다면 사랑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라 썼었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만으로도 생을 버티고 싶은 마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원형이 그런 걸까? 누군가에게 생을 기대고 희망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나 싶으면서도 차마 놓지를 못한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생각하는 모양을 따라 저들을 바라본다. 끝에 닿으면 새로이 시작될 운명의 인실과 오가타, 삼랑진 갈림길에서 헤어지며 한 발 물러서 서로를 바라보는 양현과 영광은 그래서 그 마음으로 깊어져 이어질 것인가. 그래서 결국 사랑이 외로이 홀로 버틴 저들을 구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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