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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Apr 13. 2024

갈등과 전쟁

토지 5부 3권, 통권 18권

“너의 아버지가 저리 되시고 내 마음이 갈피 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데, 양현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싶었다.” 261p.      


서희가 얼마나 양현을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 평생을 단단하게 주변의 기둥처럼 살아온 세월, 가장 연하고 연한 속 마디를 툭 잘라내 그것이 마음이다 하면 그 단면에는 양현의 얼굴이 보일 것만 같다. 모든 외부적인 조건들을 다 내려두고 환하게 그저 꽃 같은 아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서희는 처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존재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누가 감히 양현을 기생의 딸이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었을까. 양현을 질투하는 환국의 처, 덕희 마저도 서희 앞에서는 그런 기색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영원히 이별하지 않고 양현을 곁에 두는 방법으로 윤국과 결혼시키는 것은 서희 안에서 쉽게 결정지어졌을 것 같다. 순순히 이부사댁 호적에 양현을 입적시키고 내왕을 하게 했을 때 이미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칼 끝에 서 있는 세상이라 하셨지만 바로 도살의 세월이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이 거리는 평온하지만, 사람들은 무엇이든, 심지어 양은솥도 식량하고 바꾸어 며칠을 산다. 결혼? 결혼은 왜 해야 하나. 난 작은오빠하고 결혼 안 할 거야. 결단코! 영광오빠하고도 안 할 거야!’ 286p.      


양현의 세계는 온통 혼돈으로 뒤엉켜 있다. 하늘처럼 믿어온 어머니와의 갈등, 평생을 가족으로 믿고 따른 오빠 윤국을 남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 태생적 아픔을 그림자처럼 품고 사는 본인의 마음, 마음처럼 기댈 수 없는 가족, 마음대로 되지 않는 영광과의 사랑, 현재 모두를 옭아매고 있는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현실까지 어느 하나 편하고 자유로운 곳이 없다.      


윤국은 차안에 서서 피안의 양현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강을 결코 건너지 못하리라는 것을, 피안에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윤국은 깊이 깨닫는다. 양현은 양현의 길을 가고 자신은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는 있다. 죽을지도 모르고 체포될지도 모른다. 언제 딛고 있는 땅이 함몰할지 모른다. 그것은 현재 조선인이 처해 있는 입지이기도 했다. 마음으로나마 풀어주자. 양현을 그 인습에서나마 풀어주자, 편견에게도 풀어주고 세속적 기준에서도 풀어주자. 326p.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는 양현과 어는 날 부터인가 양현을 사랑하게 된 윤국이 이해가 된다. 거절하는 양현의 마음도, 양현을 보내주는 윤국의 마음까지도 이해가 된다. 너무나 슬픈 아이러니가 몇 겹으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가. 생은 참 알 수 없다. 무던한 생을 살 수 없었던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채 운명으로 묶여 흘러와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쓸렸을 뿐이다. 시절마저도 그러하다. 모두의 마음에는 전쟁이 배경처럼 존재한다. 서희의 불안도, 양현의 두려움도, 윤국의 체념도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일제의 폭정은 나날이 잔혹하고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안으로 밀어 넣고 조용히 버티고 있다.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어제는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눈으로 따라가기만 해도 숨이 차고 고통스럽다. 패악을 부리는 개동이 같은 놈이 득세하는 세상, 배불리 먹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뀜에 빠져 징용에 끌려가는 이야기, 배급표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던 전쟁이 전선이 열세라는 이야기, 그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해 군수공장에 끌려가는 학생, 부인들의 이야기, 물자가 사라지 거리의 풍경, 그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도. 일제 강점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뭉뚱그려진 서술이 아니라 개인의 현실로 마주하고 보니 날 것 그대로의 고단함이 피부에 닿는다.      


“(...) 되어있는 밥 엎어버리고 언제 꼬부랑 글씨 배워서 새 밥을 짓누, 내 것을 모멸하고 부수면서 독립운동을 해? 내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는 마음이어야 독립운동도 되는거지.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의 대표격이 이 아무개인데, 그자가 독립운동을 안 했던 것도 아니요, 그러나 오늘은 어떠한가? 당연히 갈 자리에 가서 서 있는 게야. 하루아침에 변졀한 것은 아닐세. 내 것을 버려라, 버려 깡그리 버려야만 우리가 산다, 그런던 자가 어찌 끝내 독립지사로 남으리. 결국 본받아라, 본받아라 했던 그곳으로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 아니겠는가. (...)”4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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