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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Apr 08. 2022

나쁜 뜻은 없었어요

팀원들에게 회의 공지 이메일을 보냈다. 목요일 오후에 회의가 있을 거다, 혹시 참석 못하는 사람 있으면 미리 말해달라,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회사를 나서던 중 팀장의 카톡을 받았다. “그때는 참석하기 어려워요. 다른 날로 바꿔야 할 듯….” 목요일이나 금요일로 회의를 잡으라 한 사람이 바로 그 팀장이라는 게 요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날짜와 시간을 새로 정하려 팀원 하나하나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OO입니다. 아까 이메일 하나 보내드렸는데 혹시 보셨나요?” 팀내 상급자 A에게도 전화를 걸어 그렇게 물었다. 


제가 봤는지 안 봤는지 제가 OO님께 답장해 드려야 했나요?


영화 《신세계》 중 이자성은 중국으로 떠나는 정청에게 말한다. “무슨, 파~병~가~요?” 이자성의 불안한 마음을 배우 이정재는 그 떨리는 언성으로 잘 표현했다. 상사 A의 반문도 그것과 비슷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하지만 웃으려는 기색을 잃지 않으려는 그런 목소리였다.


더럽고 아니꼽다는 생각을 하며 털레털레 걸어가다 우연히 동료 하나를 만났다. 어떤 상사가 나한테 말을 그렇게 하더라 하며 분한 마음을 토해낸다. “에이, 그분이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오늘따라 예민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웃으면서 말했다면서요.”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물은 거잖아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이 양반의 이해심이 언제부터 이렇게 깊었나 싶다. 하긴, 우리는 질문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 궁금하면 물어볼 수 있지….’


제가 보낸 이메일 보셨죠? A도 내게 이렇게 물을 때가 있다. 나 역시 그처럼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지만, 봤으면 봤다 안 봤으면 안 봤다고 답할 뿐이다. ‘봤는지 안 봤는지 답장해 드려야 했나요?’라 묻는 일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나쁜 뜻은 없었다, 내가 과민해서 그랬다, 질문만 놓고 보면 그리 지나친 표현은 아니지 않느냐 하고 변명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하더라도 말이다. 무슨 말 버릇이 그래요? 왜 그런 걸 궁금해 하시죠? 혹시 인성에 문제 있어요? 내겐 이런 질문들이 먼저 날아들 테니까.


“아, 하하, 그런 뜻이 아니라, 사실은요….” A의 반문에 나는 당황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웃기지도 않은 일에 나는 왜 웃으려 애쓰고 자빠졌을까? 나 역시 그저 물었을 뿐인데…. 욕을 한 것도 짜증을 낸 것도 아닌데…. 무슨 질문을 그렇게 하세요? 이렇게 반문했더라면 속이 좀 시원해지지 않았을까 하며 그러지 못한 조금 전 상황을 후회해 본다. 막상은 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이런 후회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경찰은 가끔 총을 쏜다. 법을 집행하는 데 적정하고 필요 최소한의 수단이라 할 수 있다면, 경찰의 총기 사용은 문제되지 않는다. 경찰 아닌 사람은 총을 지녔다는 사실만으로 수사의 대상이 된다. 어떤 이는 질문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말로 마음껏 질문을 한다. 궁금해서 물어본 거란 말에 사람들은 안심한다. 오히려 그렇게 이해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다른 어떤 이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었다는 사실만으로 곤란에 처한다. 이때 나쁜 뜻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이의 말 주머니는 총이 쌓이는 것마냥 점점 무거워지는 반면, 다른 이의 말 주머니는 그것보단 늘 가볍다.


하루는 팀장이 밥을 먹다 말고 내게 물었다. “OO씨는 결혼 안 해?” 사실은 전부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 우리는 질문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참지 말고 물어보자. 저 양반도 물어보고 있지 않은가! 주머니를 뒤져 본다. 얼마 전부터 분명 넣어 다닌 거 같은데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집에 두고 왔나?’ 옆에 있던 A가 끼어든다. “아니, 팀장님이 그걸 왜 궁금해 하세요?” 한 발 늦었다. 그의 주머니는 내 주머니보다 크고 무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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