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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Aug 14. 2022

안녕하세요?

묻지만 궁금해하지 않는 그것

알고 싶지 않으니 묻지도 않는다. '안물안궁.' 때론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묻는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거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요?' '누가 화장실서 담배 피고 지랄이야?' 대충 이렇게. 그가 죽고 싶은 건지, 환장이라도 해버린 건지, 아니면 환장을 한 게 죽고 싶어서였던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면접장으로 향한다. '파워 포즈'를 취해도 보고, '나 말고는 다 멍청이야' 하는 주문도 외워 본다. 면접장에 들어서자마자 물어본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봤지만 물어본다. 속전속결 하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외친다. "참가번호 1002번 김유석입니다!" 위원님들의 안녕은 궁금하지 않다.


'안녕'이란, 편안할 '안(安)' 자에 편안할 '녕(寧)' 자가 붙은 말이다. 편안하고도 편안하다는 뜻이다. 마치, 영화 <아가씨>에서 숙희가 히데코를 두고 ‘가엽고도 가엽구나’ 하는 표현과 닮아 있다. '안녕하세요?'는, 상대가 그러한 편안한 상태에 있는지 묻는 말이라 하겠다. 편안한 상태라 하더라도, 그게 편안하지만 불편한 상태인 건지, 아니면 불편하지만 편안한 상태인 건지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한국인의 노력을 느낄 수 있다.


입추가 지나 밤 공기가 달라질 때면, 산중 탄약고에 올라 소총 매고 섰던 군 시절이 생각난다. 군대에 가면 '남자들의 끈끈한 전우애' 같은 걸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 남자이면서 전우인 그런 사람들 중에는 치사한 녀석들이 꽤나 많았다. 우유 하나 없어졌다고 아랫사람 모두를 괴롭히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니까. 졸음을 쫓으려 후임에게 말을 건다. "넌 요즘 무슨 생각하면서 사냐?" 넌 도대체 생각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하는 핀잔은 아니었다. 희극이지만, 그래도 비극인 그 시간이 어떻게 비춰질까 궁금했다. 그에게는 편안하고도 편안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군대에서는 다른 인사말이 허용되지 않았다. '충성', '필승', '단결' 같은 말이 정해져 있을 뿐. 요즘 무슨 생각하면서 사냐고 묻는 건, 타인의 안녕 여부를 알아내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상대를 당황케 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밖에 나와서는 그렇게 묻지 않아도 됐다. 직접 묻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안녕하세요?'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그 대답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애인이랑 요즘 안 좋아요." 타인의 불편한 상태를 두고, 이땐 이랬어야지, 저땐 저랬어야지 하는 훈장질을 그동안 참 많이도 늘어놓았다. 마치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게는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듯이. 한때는 그게 상대를 걱정한답시고 하는 말이라, 그래서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라 생각했다. 마침 내 입이 알맞게 뚫려 있기도 하고 그래서, 그저 개멋에 취해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살고 있다. 가끔, 아니 꽤나 자주 새어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마.' '마음 편히 가져.' 위로의 말을 건네 볼까 싶지만, 그것도 마땅치 않은 듯하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지면 걱정이 없겠네'라지만, 안 한다고 안 할 수 있다면 그건 걱정이 아닐 것이다. 타인의 안녕하지 않음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면 그런 말이 나올까? 무례하고도 무례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세계 스포츠 열전>에서는 '칼초 스토리코'나 '하일랜드 게임'처럼, 이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게임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 속에서 울기도 웃기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너의 안녕, 혹은 나의 안녕은 모두 저마다의 게임에서 비롯된다. 게임에서 패했다고, 나는 참여하지 않는 그런 게임에서 패했다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사람에게, 걱정 말라든지 마음 편히 가지라든지 하는 건 위로라기보단 잠깐 머물다 사라질 입김이라 할 수 있다. 너의 안녕하지 않음에 할 말이 없다. 그러니 궁금해하지 말자.


안녕하세요?


안녕하다는 대답을 들으면 마음이 좀 편해질까 싶지만 꼭 그럴 거 같지도 않다. "저 아파트 분양 됐어요! 드디어 우리 가족에게 보금자리가 생긴 거죠. 이젠 집을 구하느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내게는 편안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두고 그 사람은 편안하다 말한다. 보금자리를 마련한답시고 청약 신청을 하고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그 옆집에, 아니면 그 윗집에 누가 살게 되는지는 관심이 없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나도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 방금까지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안녕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한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난 어쩔 수 없는 아가리인가 보다.


"회사 잘 다니고 있어요. 머리 아픈 고민이나 생각은 잘 안하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지내고 있답니다. 몸도 마음도 챙기면서 말이죠." 1인 기업에 다니는 게 아닐 텐데,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면서 지낸다 한다. 그 좋은 것이 과연 동료에게도 좋은 것일지 의심스럽다. 그의 취미관을 유추해 본다. 저런 걸 편안하다 여기니 이런 것도 편안하다 하겠구나 하고 내 맘대로 재단한다. 안 그러고 싶지만 늘 그러고 있다. 마음을 다잡기 어려우니 듣지 않는 것이 낫겠다. 궁금해하지 말자.


"사장님도 선배님들도 매우 잘해 준답니다." 꽤나 부러운 일이다. 좋은 사장도 좋은 선배도 만나 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게 정말인가 싶다. 학교에서든 회사에서든 나 역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잘 되진 않았지만. 내가 운이 나빴다 생각하니 슬퍼진다.


어쩌면 운이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혼자 된 기분도 든다. 드라마 <D.P.>나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나는 그런 거 없었다', '작품이라 과장된 것 뿐이다' 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런 기분이 들었었는데. 누구 말마따나, 나는 왜 안 좋게만 보려할까? 보금자리 마련한다는데,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살겠다는데 나는 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듣지를 못할까? 그래 놓고 아파할 거면서. 다시 슬퍼진다. 역시 듣지 않는 편이 좋겠다. 궁금해하지 말자.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누군가 매일밤 나의 안녕을 묻는다. 시청자 된 도리로, 어떻게 말할지 생각해 본다. '글 쓸 기분이 안 드네요. 기분 좀 내 볼까 해서 키보드를 하나 샀답니다.' 그가 말을 이어간다. "ABC 뉴스, 김유석입니다. 첫 번째 소식입니다." 편의점 사장님, 지난 번 망치를 빌려 준 그 고마운 사장님도 매일 내게 묻는다. "안녕하세요?" 뉴스랑은 다르겠지 하며 답할 결심을 한다. '새로 산 키보드에 흠집이 생겨 매우 마음이 쓰여요. 밥을 먹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생각이 나요.' 오늘따라 바쁘셔 그런지, 사장님은 내 결심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3,800원입니다. 카드 꽂아 주세요." 하긴, 언제 기다려 준 적 있나 싶다. 못된 습관은 나만의 것이 아닌 듯하다. 혼자 된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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