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부터 용기가 없었다. 불의를 보면 피는 끓었지만 쉽게 나서지 못했다. 당당히 말해야 할 때면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인생의 큰 전환이 있던 스물한 살, 용기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객을 구하러 지하철 선로에 뛰어든 한국 유학생의 이야기, 가던 길을 멈춰 응급환자에게 응급처치를 하는 시민의 이야기 등등. 이런 이야기들이 일종의 버킷리스트가 되었달까.
용기 있는 언행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용기라 부르지 않을까 싶은데. 용기 있는 언행을 하려면 매뉴얼 같은 걸 만들어 두는 게 좋겠단 생각을 했다. ‘A 상황이 오면, B를 하겠다.’ 가령, ‘취객이 선로에 떨어진다면, 뛰어들겠다’, 뭐 이런 식으로. 이런 것들을 머릿속 어딘가 잘 보이는 곳에 잘 정리해 둬야, 적시에 찾아 쓸 수 있을 테니까.
이런 것도 있었다. 옛날에 <학교> 같은 드라마에서 흔히 봤을 법한. 돈이나, 비싼 신발, 뭐 이런 귀중품이 없어지고, 담임선생님은 학생들 모두 자리에 앉혀 눈 감게 하고. 용서해 줄 테니 누군지 조용히 손 들라 하고. 보통 그러면 범인은 손 안 들고. 그런데 범인이 누군지 아는 학생은 거짓으로 자백하고. 자기가 안 했으면서 자기가 했다고. 이런 게 의롭진 않은 것 같지만, 매뉴얼 같은 걸 만들어야 생각했을 땐 이런 것도 용기라 믿었던 거 같다. 아니면 그냥 그게 멋있어 보였거나. 그래서 나는 머릿속에 이렇게 만들어 두기로 했다.
‘타인의 죄를 내가 뒤집어 쓴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딱 그런 상황이 찾아왔다. 그때는 군에 있었다. 아침 점호 중이었고, 점호는 여러 대대가 한 연병장에 모여서 진행됐다. 그날 점호를 주관하는 연대 당직사령은 우리 대대장이었다. 그리고 우리 대대를 인솔하는 당직사관은 그 대대장에게 충성을 다하는 김중위였다. 대대장은 ‘전방에 함성 3초 간 발사!’를 외쳤고, 점호가 끝날 무렵 그는 우리 대대의 목소리가 작았던 것을 문제삼았다. 점호가 끝났지만 김중위는 우리 대대원 전체를 연병장에 그대로 세워 두었다. 연병장에 우리만 남게 되자 그는 꾸중하기 시작했다. 니네 대대장이 사령인데도 목소리가 그따위냐며.
엎드리랜다. 그때는 1월이었다. 강원도의 1월은 많이 춥다. 땅을 짚고 있던 손은 깨질 듯이 아팠다. 뭐, 물론 남한 땅 어디라도 엎드려뻗쳐를 1월에 하면 손이 깨질 거 같을 테지만.
그때 “상병 꺾인”, 그러니까 짬이 어느 정도 차서 무서울 게 없는 그런 박상병이 욕을 했다. 엎드려뻗쳐를 한 채로. “씨발.” 안 들리게 한다고 한 건지, 들으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들은 김중위가 말했다.
“씨발이라고 한 새끼 나와.”
박상병이라는 선임은 평소 호기로운 성격이 아니었기에, ‘들켰다, 어떡하지?’ 하는 느낌으로 주변 눈치를 살필 뿐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중위는 다시 말했다.
“씨발이라고 한 새끼 나올 때까지 아무도 못 간다.”
1월의 엎드려뻗쳐. 오전 일곱 시, 연병장에서의 엎드려뻗쳐. 손이 너무 시려웠고, 그래서 아팠다. 다른 사람들도 아파했던 것 같다. 어떤 놈이냐, 빨리 자수해라, 뭐 이런 분위기? 그때의 추위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매뉴얼이 생각났다. ‘아, 지금이라고?’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까지껏 하자라는 생각으로 일어섰다.
“상병 김멸치! 제가 그랬습니다!”
“김멸치, 넌 행정반에 가 있어. 다들 일어서서 분대 단위로 취사장 이동한다, 실시.”
모든 대대원이 취사장으로 향할 때, 나는 정반대의 길을 홀로 걷게 되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행정반으로 가는 길에 잠깐 기우뚱했던 것도 같다. 현기증이 왔달까.
행정반에는 내가 먼저 도착했고, 머지않아 김중위도 들어왔다.
“김멸치 상병. 너 아니잖아. 밥 먹으러 가.”
김중위는 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뜻밖의 결과였고, 그래서인지 짜릿하기도 했다. 내 진심을 알아주다니. 그에게 고맙다 말하고 행정반을 나섰다.
김중위 덕에 그때의 “거짓자백” 사건은 추억이 되었다. 용기를 부렸더니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길에 쓰러진 사람을 도우려 나선 적도 있고, 지하철 문에 가방이 끼어 당황하는 승객을 보고 억지로 문을 열어젖힌 적도 있고. 해외에서 지하철을 이용할 때면 혹시 취객이 없나 두리번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군에서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이런 것들이 꽤나 쉬워진 것 같다.
김중위 덕에 그래서 그렇게 해피엔딩이었냐고? 아니. 취사장으로 가면서 기분이 좋았는데, 그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식판에 밥을 받아서 이제 먹으려 하는데 먹을 수가 없었으니까. 선임병 한 명 한 명 지날 때마다 나한테 말을 걸었다. 선임병이 말을 하면 후임병은 관등성명을 대야 하니까.
“씨발, 너 꺾였냐?”
“물상이 돌았나, 어디서 개겨?”
“짬찌가 선임 몇을 벌 주는 거지?”
사실 말을 건 건 아니고, 뭐, 이런 갈굼을 줄줄이 당했지. 며칠은 괴로웠던 거 같다. 그런데, 박상병은, 그 욕을 한 박상병이란 인간은 그 일을 두고 내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