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아, 진짜라고요!
나: 에이~ 오바가 심하시네. 여기가 호주도 아니고. 무슨 바퀴벌레가 그렇게 주먹 만해요? 껄껄.
제이: 직접 봤다니까요?
나: 아, 오케이, 오케이. 알겠어요. 근데, 그거 아세요? “잘못된 기억”이라는 게 있다는 거.
제이: 뭐, 까먹으면 잘못 기억하는 거 아닌가?
나: 흠, 뭐, 그렇네요. 사실 ‘기억’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얘기가 있어 그래요. 모른다고 해야 뭔가 스무스하게 넘어갔을 텐데.
제이: 뭐, 이야기꾼 다 되셨네요. 뭔데요, 그냥 말하세요.
나: 네, 크크. 저는 대학교 5학년을 다녀 봤거든요?
제이: 4학년까지 있는 거 아니에요?
나: 학점 좀 못 채워서, 크크.
제이: 아, 맞아. 그런 거 있다.
나: 근데 그게 수업 딱 하나 못 들어서 생긴 일이에요. 한 학기 더 들으려고 60만 원 정도 낸 거 같은데. 아무튼. 그때 교양 하나를 채워야 했는데, 그때 들은 게 심리학 강의였어요. 그기서 ‘기억’이라는 주제를 다룬 기억이 나네요.
강의 중에 테드 강연을 하나 보여주더라고요. 강연 제목이 ‘How realiable is your memeory?’ 우리말로는 ‘기억의 허구성’이었던 거 같은데. 그 있잖아요. 테드 강연에 우리말 제목 붙는 거. 그게 그렇게 번역되어 있더라고요. 테드 강연자가 어디 교수랬던 거 같은데. 그 사람 관심사가 ‘잘못된 기억’이래요. 영어로는 “False memory.” 그 요지부터 말하면, 사람의 기억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조작? 왜곡? 뭐 그런 게 쉽게 된다는 내용이에요.
제이: 음….
나: 보통 우리 첫사랑이 애틋하게 기억되는 게, 살면서 첫사랑에 관한 판타지물을 콘텐츠로 접하게 되는데, 그게 그 기억을 미화하기 때문이래요. 그 교양 교수가 테드 강연 다 보여주고는 그러더라고요.
영화 <건축학개론> 보고 옛날 생각난다는 사람 몇 봤거든요, 저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전부 한국 대졸 남자다? 크크. 첫사랑 떠올릴 때 수지를 떠올리겠지, 걔네들은. 막 김동률 노래 나오고. 막상 그 상대들은 걔네들을 찌질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말이죠. 크크. 아무튼.
그 테드 강연에서, 어떤 남자의 일을 사례로 들더라고요. 하루는 밤에 그 남자가 약혼녀랑 어디 다녀오는데 경찰이 불러 세우더래요. 그 사람 차가 어떤 용의자 차랑 색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 용의자는 강간 용의자고. 경찰이 그 남자 보고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그 남자는 괜찮다 해서, 그래서 사진 찍어 갔대요. 근데, 경찰서에서 그 피해자라는 사람이 그 남자 사진을 보더니, 경찰이 찍어 온 얼굴 중에 그 남자 얼굴이 제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는 거예요. “제일 비슷하게” 생겼다고. 그러니까 영어로는 “the closest.”
그래서 기소됐대요. 재판에서는 그 피해자가 증인으로 나오고요. 여기서 그 피해자가 뭐라고 증언했게요? 그 남자가 범인임을 확신한다고. 영어로는 “absolutely positive.”
그래서 판사는 유죄 때리고, 가족들 절규, 약혼녀 절규. 그 남자 결국 감옥 가고. 근데 그 남자는 이걸 못 받아들여서 감옥 안에서도 밖에 있는 기자한테 연락하고. 다행히 그 기자가 이걸 제대로 파요. 그래서 진범도 찾고, 재판 다시 열리고, 그래서 그 남자 무죄 판결 받고. 땅땅땅.
근데 그 남자는 이미 망가진 거죠. 직장 잃고, 약혼녀도 잃고. 졸라 빡치면 그 분노가 옆 사람한테도 퍼지는, 뭐 그런 거겠죠. 돈도 다 잃었대요. 경찰이고 검찰이고, 뭐, 자기가 감옥가게 만든 모든 사람한테 소송을 거느라. 손해배상청구소송. 그러고 법정에서 판결 받기 며칠 전에 죽었대요. 심장마비로. 비극이죠.
제이: 나 같아도 개빡치다 뒤지겠네요.
나: 그니까요. “범인과 제일 비슷하게 생겼다”에서 어떻게 “범인임을 확신한다”로 갔는지, 그 테드 강연자가 설명하더라고요. 스트레스를 받거나, 다른 정보가 주입되거나, 뭐 그렇게 되면 기억은 그렇게 왜곡된다고. 그러고는, 그런 거 있잖아요. 심리학에서 보여주는 실험 결과들. 사람에게 거짓 기억을 주입하는 게 얼마나 쉬운지 막 보여줘요.
제이: 음….
나: 근데, 이 사례 듣고, 이게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제이: 깜빵 다녀오셨어요?
나: 하하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비슷해. 들어봐요.
중학교 3학년 때 일이에요. 점심시간 끝나고 바로 다음 수업 시간이었는데. 누가 교실 문을 노크하더라고요. 학생주임 센세였어요. 수업하는 센세한테 몇 마디 하더니, 그러고 남자애들은 다 일어서래요. 학주는 뭐 원래 어딜가나 무서운 사람이 한다고 하던데, 나도 그때 학주가 무서웠거든. 그냥 시키는 대로 했죠. 다들 뒷문으로 나와서 한 사람씩 앞문으로 들어가래요.
근데 그 학주 옆에 어떤 여자 꼬맹이랑 여자 어른이 같이 있더라고요? 그 여자 어른은 그 꼬맹이 엄마인 거 같던데. 안 물어봐서 그게 진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데 그 꼬맹이가 교실 앞문으로 들어가는 남자애들 얼굴 하나하나를 빤히 쳐다 보더라고요?
이제 내 차례가 됐는데, 뭔가 두발 검사 받는 것마냥 안 걸렸으면 좋겠다, 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거 같아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교실로 들어가려 하는데, 그 꼬맹이가 나를 가리키며 말하더라고요.
“저 오빤 거 같아요.”
제이: 엥? 뭐가요?
나: 있어 봐요. 곧 알게 됩니다. 그땐 나도 몰랐지. 학주가 나보고 남교사 휴게실에 가 있으래요. 그래서 갔죠. 갔더니 나 말고도 다른 남자애들이 많더라고요. 스무 명은 되었던 거 같은데. 걔네들도 꼬맹이한테 선택돼서 온 거 같더라고요.
좀 있으니까 학주가 오더라고요. 꼬맹이랑 그 여자 어른도 같이. 남자애들은 휴게실 한 편에 줄 서서 서 있고, 그 셋은 우리 맞은편 끝에 앉아 있고. 저기 끝에서 부터 한 사람씩 ‘00학년 00반 00번 000입니다’ 해 보래요. 큰 소리로. 곧 내 차례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했죠. “3학년 3반 3번 000입니다!”
“저 오빠예요!”
그 꼬맹이가 나를 가리키고 있더라고요. 뭔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라고 하더라고. 뭔가 싶었는데, 그때도 난 몰랐어요. 그 꼬맹이는 나 말고도 “저 오빠예요!” 하며 몇을 더 골라냈죠.
제이: 그게 뭐였는데요, 그니까.
나: 나중에 알았어요. 그게 성폭행? 성추행? 아무튼 용의자를 골라내는 과정이었다는 걸. 학교가 아파트 단지랑 담 하나 두고 바로 붙어 있었거든요? 어떤 미친놈이 교복 입고 점심시간에 나가 가지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애한테, 그니까 여자 애기한테 뭘 했나 봐요. 그 꼬맹이는 그 여자애랑 같이 놀고 있던 친구인 거 같고. 그 놀이터에서 본 남학생이 나랑 비슷하게 생겼나 봐요.
제이: 깜빵 다녀오신 거 맞네요.
나: 아, 아니라고, 크크.
제이: 크크. 근데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나: 몰라요. 뭐 그냥 묻혔어요. 그런 건 애들이 알 수 없겠죠. 아마 범인을 찾았고, 그 범인 부모가 조용히 넘어가게 하려고 뭐 어떻게 하지 않았을까요? 합의금을 줬다거나, 직접 찾아가 삼배구고두를 했다거나, 뭐 그런 식으로.
제이: 근데, 삼배구고두가 뭐예요?
나: 그냥 무릎 꿇고 사과했다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공부 좀 하셔야겠네.
제이: 예…. 근데 이 얘긴 왜 하시는데요?
나: 내가 이 얘길 왜 했냐? 그냥 테드 강연 얘기하다 생각나서 그냥 해 봤어요.
제이: 아, 예.
나: 테드 강연이 주는 교훈이 뭔 줄 아세요?
제이: 뭔데요.
나: 우리 기억은 연약한 것이다. 영어로는 “fragile.” 누가 어떤 걸 아무리 구체적으로 자연스럽게 기억한다 해도, 그게 곧 그 기억을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되진 않는다. 그러니까 당신 바퀴벌레 드립도 오바가 맞다!
제이: 당신은 도대체 뭘 믿을 수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