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강팀에 속하노라면 마치 내가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 동고FC 소속이오. 등번호도 마찬가지. 좋은 번호를 달고 있으면 내가 잘하는 선수가 된 것 같은 거지. 나, 7번이오. 우와, 손흥민도 7번이고, 호날두도 7번이라잖아요? 축구 정말 잘하시나 봐요. 축구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나 먹히는 말. 물론, 축구를 직접 하는 일이 없는 사람에게도 그렇겠지만. 하지만, 축구 볼 줄 아는 사람은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당신이 7번이라고요?
등번호를 배정할 때가 오면, 보통 그건 연초가 되겠는데, 과연 등번호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축구선수 등번호를 검색해 보니 그건 포지션 혹은 역할을 뜻한다는 것 같다. 1번은 보통 골키퍼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10번은 팀의 플레이메이커라고 하는데 플레이메이커는 보통 미드필더나 공격수일 테니, 역시나 등번호란 포지션이나 역할을 뜻한다 할 수 있겠다. 7번 스타 플레이어도 뭐 그런 뜻이겠고. 물론, 포지션이나 역할이 아니라, 누군가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선수의 번호를 택했을 뿐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존경이랄까 추앙이랄까, 하는 그런 뜻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손흥민의 7번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손흥민의 포지션에서 뛰는 사람들이기에, 역시나 포지션이나 역할을 뜻하지 않을까 싶다. 아, 데이비드 베컴은 언젠가 레알마드리드에서 23번을 택했는데 그게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의 23번이었다고? 이건 반칙이잖아.
등번호라는 것은 1950년 즈음해서 도입됐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 역사를 보더라도 등번호는 포지션이나 역할을 뜻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 선수들을 배치하고 이들에게 아군의 골문에서부터 차례로 번호를 부여하다 보면, 저기 앞에 일곱 번째 선수는 대개 미드필더일 테고 저기 열 번째 선수는 대개 공격수일 테니까.
이렇게 보면, 전통적으로 1번에서 11번까지는 감독의 마음에 든 사람이 받았던 번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경기에서 먼저 투입하고 싶은 열한 명은 바로 이렇답니다, 여러분. 1번은 너, 2번은 너, 3번은 너…. 최근엔 선수가 자신의 번호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도 최종 엔트리 규모가 최대 번호가 되고 그 안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듯하다. 물론, 이것도 프로 리그 규정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같은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그렇다는 것 같다.
이제껏 어는 팀에서도 등번호는 59번으로 신청했다. 5월 9일. 바로 내 생일을 뜻하는, 그래서 무엇보다 내 아이덴티티를 잘 나타내는 그런 번호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있었다. 내가 7번을 어떻게 달아, 민망하게, 아유. 마치 인스타그램 계정 소개글에다가, 아니면 카톡 상태 메시지에다가, ‘흔들리지 않는 신념’, ‘늘 깨어 있으라’, ‘치열하게 사유하라’, 뭐 따위 걸 써 놓은 거 같은 기분이랄까? 늘 깨어있지도 않고, 내 신념은 늘 흔들려 왔으며, 게다가 대충대충 사유하는 내가 그런 걸 써 놓았다가, 나의 허세가 남들에게 들통날까 무서웠던 것인지.
왼쪽 측면 수비수는 보통 3번을 달고 뛴다고 하던데. 에이, 그건 나보다 더 잘하는 지유나 성태에게 갈 번호야. 동고FC에 들어온 첫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나보다 잘하는 측면 수비수는 늘 있었다. 내가 팀에서 제일 잘나가는 측면 수비수라 해도, 이 아마추어 세계란 한 없이 넓은 것을…. 그렇게 자신이 없던 나는 내 아이덴티티를 잘 드러낸다는 진심 반 핑계 반인 그런 이유로 59번만 달고 뛰어 왔던 것이다. 전통적 의미를 갖는 번호를 지원하는 친구들, 쟤네는 도대체 얼마나 자존감이 큰 거야?
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욕심이 났다. 3번의 주인이, 누군지 기억은 안 나지만, 팀을 나가게 되었고, 빈 자리가 생긴 걸 보니, 나도 네임드 번호 한 번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생기게 되었다. 3지망으로 59번, 2지망으로 22번, 그리고 1지망으로 3번을 했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22번은 국가대표 설영우 선수의 번호를 따라하느라 그랬다. 그나저나 그 친구는 왜 22번을 택한 거지? 이러면 앞뒤가 안 맞잖아. 아, 2번을 두 개 둬서 22번? 말 된다, 말 돼.
3번을 1지망한 친구들은 나 말고도 몇 있었기에 되긴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59번도 괜찮지, 하는 위로를 스스로 한 거 같기도 하고. 며칠 후 명단이 공개되었고 명단 중 3번 자리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독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뒤따랐다.
중복되는 등번호는 포지션, 팀 활동 기간 등을 고려하여 배정하였으며 혹시 배정받은 번호를 다른 번호로 변경하고 싶은 분들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짬 대우를 받은 기분이군. 팀 창단부터 쭈욱 소속되어 있던 나인지라, 3번을 받은 게 어딘가 경로우대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민망한 구석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3번 선수가 된 것이었다.
5월 9일, 내 생일이던 그 훈련 날. 훈련장에서는 아무도 내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내 등번호 보냐 이거지. 올해 K-7 리그가 시작되었고, 나는 거의 모든 경기에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감독의 마음속 3번은 언제나 내가 아니었으니까. 3번을 단다 해서 하루아침에 주전 선수가 된다고 생각했는가, 친구? 괜한 데 마음 쓰지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