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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Oct 23. 2024

축구화

2023년 동작구 K-7 리그 1경기 전, 마지막 연습경기가 있던 날이다. 일종의 평가전이랄까. 두 시간 동안 쿼터를 넷으로 나누었고, 실제 리그 경기와 유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1, 2쿼터는 A팀 1군 선수들이, 3, 4쿼터는 2군 선수들이 뛰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 점은 그날 팀 미팅에서 알려졌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굳이 일찍 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억울함이 살짝 들 수도 있을 만큼, 그런 이른 시간에 나는 경기장에 도착했다.


“저… 이거 보세요. 여자친구가 사 줬어요, 헤헤.”


나와 같은 포지션의, 그렇지만 감독 마음의 1순위에 있는 승수도 나와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는데, 평소에 팀원들에게 먼저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나였지만, 승수에겐 먼저 싹싹하게 구는 면이 있었고, 그날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새 신발을 샀던 터라, 관심이 없어 할지도 모를 그에게 나는 먼저 그렇게 축구화 자랑을 해 봤던 것이다.


그날 경기에서 나는 꽤 잘 했던 것 같다. 감독도, 경기가 끝나고 모두가 짐을 챙기는 마당에, 아,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하는 느낌으로 굳이 내 이름을 불러서, 성호님 오늘 정말 잘하셨어요, 하고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요즘의 측면 수비수가 다 그러해야 한다는 것처럼, 공격 작업에서는 패스 실수가 적었고, 수비 진영을 갖춰야 할 때는 적당한 때에 적당한 위치에 서 있었다. 상대 패스를 끊어낸 적도 많았고, 심지어 1대1 수비에서는 과감하게 도전해서 공을 뺏어낸 적도 있었다. 좋았어. 아주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거야.


"오, 형님. 그거 어때요?"

"정말 가벼워요."

"돈 좀 줬을 거 같은데, 20만 원 넘게 줬죠?"


경기 전 승수는 내 축구화 자랑에 관심을 보이며 그렇게 물었다. 정가는 28만 원인가 하는데, 할인을 받아서 26만 원 정도만 주고 샀다고 내가 말했지만, 곧, 축구화를 큰 돈 주고 산 것을 자랑해도 되는 일인가, 이 친구는 내가 비싼 축구화를 산 것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괜한 소릴 한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불편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살면서 10만 원 넘어가는 축구화를 내 돈 주고 사 본 적이 없다. 발 안쪽 표면에 고무 돌기가 붙어 있는 축구화처럼, 2002년 월드컵 때 데이비드 베컴 같은 선수들이 신을 법한 그런 비싼 것을 선뜻 사주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지 않은 나는, 비싼 축구화란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부잣집 아들래미나 딸래미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물건이라 생각했다. 축구화가 갖고 싶어 어찌저찌해서 아버지를 백화점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한 어린 나는, 진열대에 있는 축구화 중에서도 10만 원 넘어가는 축구화는, 마치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애써 외면했고, 5만 원보다는 조금 더 비싼 7, 8만 원 정도 하는 축구화에만 눈이 가는 듯 행동했다. 이게 마음에 드는 거야? 네. 내가 고른 축구화는 신상이 아니었고, 딱히 예쁘지도 않았지만, 이것보다 비싼 것을 고르면 아버지의 기분이 안 좋아질 것 같았기에, 내면에서 적당히 타협한 결과로 나는 그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처럼 대답한 것이었다.


비싼 축구화는 축구를 잘하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절약 정신은 내 안으로 들어와 그런 식으로 또 다른, 비교적 합리적인 모양새로 자리하게 되었다. 돼지 목에 진주, 빛 좋은 개살구, 이런 말을 자주 하시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희소한 자원은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써야 하고, 혹시 엉뚱한 데 쓴다면 그건 참으로 보기 흉한 것이다, 하는 지론 같은 것이 내게도 생겼달까. 축구화가 실력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축구로 밥 벌어 먹을 정도의 실력이 내겐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던 나는, 어차피 못하는데 좋은 거 신어 봐야 무엇하나 하는 생각으로, 10만 원 넘어가는 축구화는 간단히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축구화 덕분이었을까? 최신 기술이 적용되었다는 그 비싼 축구화는 너무 가벼웠고, 그래서 한 시간 정도를 경기에 준하는 강도로 뛰었는데도 다리나 몸이 피로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슨,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 같군. 새 신을 신고 뛰어 보자, 폴짝.


최근에 언제 내가 축구화를 샀었더라. 생각해 보면, 전에 있던 팀에서 형들이 조금 신다가 실증이 난다고 해서 버리려는 걸 받으며 지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갑자기 축구화가 사고 싶었던 건 왜일까? 그해 봄부터 마치 금방이라도 질러버릴 것 같은 기세로 축구화 구경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축구화란 것이 TF, FG, AG 등 운동장 상황에 맞게 제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만 사야 한다면 TF를,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AG를 하나 더 장만해 두는 게 상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국에는 인조잔디 구장이 대부분이니까, 천연잔디용으로 출시되는 FG는 사면 안 되겠군. 구장 상황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으면, 잠깐은 모르겠지만, 그런 신발을 신고 오랫동안 뛰어다니면 발목, 무릎, 허벅지, 아니면 그 어딘가에 피로가 누적될 것이고, 그게 어느 날 부상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당사자는 다치고도, 그저 축구가 격한 운동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그 이유를 모른 채 넘어간다나 뭐라나.


오랫동안 안전하게 축구를 하고 싶었던 나는 AG 위주로 축구화를 찾아보고 있었다. 이미 집에는 형들이 준 TF 축구화가 세 켤레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점 하나를 발견했는데, 아디다스나 나이키 같은, 축구화를 제조하는 주요 회사들이 한국에서 판매하는 축구화들 대부분은 FG라는 것이었다. 축구화는 상급, 중급, 하급, 뭐 이런 식으로 나뉘고, 상급이 당연히 하급보다 비싼데, FG는 상급부터 하급까지 다양한 모델로 출시되고 있지만, AG는 거의 상급으로만 출시되고 있었기에, 나는 백화점에 가서도 온라인 쇼핑을 하면서도, 고작 몇 안 되는, 하지만 10만 원은 무슨, 아주 20만 원을 가뿐히 넘어버리는 축구화들을 보고, 어우 어우, 하며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게다가, 이 세상 축구화 디자이너들은 다 뒤져버렸는지, 하나 같이 안 예쁜 것들뿐이라서 막 사고 싶다는 기분도 나지 않았다.


지현은 이번 생일 선물로 사줄 테니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보라 했다. 고민은 배송을 늦출 뿐.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기도 하고. 비싼 물건을 선물로 주고 받는 게 영 편치 않았던 나는 지현과, 됐다, 너무 비싸다, 안 필요한 거 같다,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가, 그 마음을 안 받아주는 것도 뭣 한 것 같아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샀던 것이 그날 그 축구화였던 것이다.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 겨우 마음에 드는 걸 하나 찾았는데, 내 사이즈는 다 품절이었으니까. 그날 경기장에서 승수에게 자랑한 축구화는, 매장 두 군데 정도 갔다가 헛걸음을 하고, 아마 공식 매장에는 다 품절일 거예요, 하는 직원의 절망적인 얘기를 듣고, 동대문에는 축구화 편집샵이 두 곳 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중 하나에 갔다가 역시 품절이란 얘길 듣고 ‘꿩 대신 닭’으로 다른 축구화를 신어보고 집에 돌아왔다가, 그냥 사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동대문에 갔다가 편집샵이 거기 말고 다른 데도 있었단 걸 깨닫고는 들렀다가 찾았던 것이다.


그해, 동작구 K-7 리그가 시작되었고, 우린 리그 준우승이라는 아쉬운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3승 1무 1패. 리그 두 번째 경기, 그러니까 리그 우승이라는 꿈이 산산조각나기 일보직전의 바로 순간, 우리는 득점이 필요했고 시간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1분 1초를 아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경기장 밖으로 나간 공을 다시 넣어주는 것, 후에 알게 되었지만 리그 규정 위반이라 하는 그것뿐이었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빠르게. 마라톤 트랙, 주차장이 있는 아스팔트 바닥, 벤치가 있는 잔디 없는 흙바닥, 그날 나는 어디든 가리지 않고 공을 주으러 다녔다. 생일 선물로 받은 새 축구화를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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