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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엇비슷 Jan 10. 2021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해

‘대화가 필요해’

이 문장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는지. 과일 이름을 가진 혼성 그룹의 노래라든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어떤 개그 프로그램이라든지. 서로가 좋아서 만난 커플이라도, 한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더라도, 대화는 언제나 부족한 것 같아 보인다. 해도 해도 부족하고, 뭔가가 하나 빠진 듯하고, 늘 대화가 필요한 이들에게, 여기 대화가 늘 넘쳐나는 우리 우체국을 소개해주고 싶다.




만남의 광장이 서울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여기에 있었다. 우체국이 작은 마을에 있다 보니 방문하신 고객님끼리 서로 아는 사이인 경우가 있다. 얼굴을 보시곤 깜짝 놀라며, 이름을 부르며, 누구 아니냐며, 잘 살았냐며, 요새 뭐하고 지내냐고 물으시는 고객님들. 굳이 만나려고 한 게 아니라서 더 반가우신 모양이다. 가끔 업무가 끝나고 나가시는 분과 업무를 보려고 들어오시는 분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경우도 종종 있다. 출입구에서 그대로 서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의도치 않은 ‘길막’으로 다른 고객님들에게 불편을 주시기도 한다.


요새는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다니시는데, 이로 인한 이야기도 있다. A고객님이 ATM기에서 돈을 찾으시고 나가시다가, 내가 있는 창구에서 업무를 보고 계신 다른 B 고객님을 유심히 쳐다보신다. 한참 보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우리들 사이로 고개를 불쑥 들이미시는 A고객님. B 고객님은 황당함과 짜증이 섞인 표정을 하시다가 금세 반가운 얼굴을 하신다.

“아이고 누군가 했더니!” “마스크를 쓰니까 누군지 통 못 알아보겠네!”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시고, 제수씨는 잘 지내는지 통 본 적이 없다 하시고, 그 친구는 또 잘 있는지 궁금하니 한 번 모여서 술이라도 먹자 하시고. 이대로라면 말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중간에서 적당히 대화를 끊는 내 기술은 나날이 늘어나고.


아는 사람 간의 대화도 풍성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대화는 넘쳐난다. 두 할머니가 긴 대기의자에 나란히 앉아 계셨다. 한 분은 친구를 따라오셨고, 다른 한 분은 우체국으로 오실 친구를 기다리고 계셨다. 기다리시기 영 적적하셨던 모양인지 두 분은 대화를 시작하셨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시던 중에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한 할머니가 물어보신다. “그러면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반대편 할머니가 이제 여든이 되었다고 하니 박수를 치시곤 웃으며 말씀하신다. “아이고! 그럼 아직 한참 때네!”


대화도 많고, 어찌 그리 정도 많으신지. 가끔 업무를 마친 고객님들이 물건을 창구에 두고 가시는 경우가 있다. 보통 ‘고객님 물건 놔두고 가셨어요! “라며 내가 알려드리는 편이지만 내 시선의 사각지대인 상품 팸플릿 꽂이 앞에 물건을 두고 가시면 잘 확인할 수가 없다.

한 고객님이 자동차 열쇠를 놔두고 가신 모양이다. 다음 고객님이 의자에 앉으시다가 열쇠를 발견하고는 내게 보여주신다. “이거 앞에 손님이 놓고 가신 거 같은데?” “엇. 그러네요! 고객님! 여기 차 키 놔두고 가셨어요!”


고객님과 내가 동시에 일어나서 문을 쳐다보며 열쇠 주인을 부르고. ATM기를 쓰시던 분과 대기 의자에 앉아계셨던 분도 덩달아 열쇠 주인을 찾고. 건물 안으로 물건을 들고 들어오시던 분도 나가시던 열쇠 주인을 붙잡고. 갑자기 분위기는 가족오락관 고요 속의 외침. 열쇠 주인은 연신 고맙다고 하시며 분실물을 찾아가신다. 문이 닫힌 뒤 너나 할 것 없이 뿌듯한 표정을 하고 계신 고객님들. 다들 뭔가 해냈다는 미소를 짓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K-정(情)일까.


나도 대화에 참여하는 일이 많다. 지난 여름에 한 고객님이 끙끙거리며 박스 하나를 가져오셨다. 강원도 어느 군 어디 길 사서함 몇 번 땡땡부대 상병 아무개. 어머니는 군에 있는 아들에게 책이라든가 과자등을 보내시러 한 달에 한 두 번쯤 우체국을 방문하셨다. 자기 군생활은 늦게 가지만 남의 군생활은 빨리 간다고, 분명히 저번에 접수할 때는 이병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일병을 달고 지금은 상병이 되어 있구나. 이제 아들 볼 날이 얼마 안남았다고 말씀 드리는 내게 고객님은 진짜 그렇다며 하루 빨리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며칠 전 우체국을 찾아오신 고객님. 등기를 보내신다고 주신 편지봉투에는 어디서 많이 본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더이상 이름 앞에 상병이나 병장같은 계급이 붙지 않는 어엿한 민간인(?)이 된 아들. 군청에서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모집하는데 등기로 지원서류를 보내야 한다고 해서 찾아오셨단다. 그런데 아들이 왜 직접 안오고 어머니가 대신 오셨냐고 여쭤본다. 아들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기만 하니 속에 열불이 터져서 접수하러 오셨다고. 제대한지 얼마 안됐으니 그래도 좀 놀고 싶지 않겠느냐 드리는 말씀에 벌써 2개월이나 지났다고 하신다.


"아. 그정도면 충분히 놀고도 남았죠! 빨리 일해야지!"

"그렇죠?"

나도 웃고, 고객님도 웃고, 뒤에서 기다리시던 다른 고객님도 그 말이 맞다며 웃으시고. 집에서 놀고 있는 아들은 지금쯤 아마도 귀가 양쪽으로 간지럽지 않을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등등. 말과 대화에 대한 속담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속담이 가장 마음에 든다. ‘비단 대단 곱다 해도 말같이 고운 것은 없다’ 비단이 아무리 곱다 해도 아름다운 마음씨에서 우러나오는 말처럼 고운 것은 없다는 말이라 한다. 늘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질 수 있기를. 그래서 나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고운 말들을 선물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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