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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엇비슷 Jan 06. 2021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이 동네 비공식 안내소

산과 들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가던 어느 가을날.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으신 두 분이 우체국에 들어오셨다. 우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가을이 되면 단풍이 아주 기가 막힌 명소로 변한다. 등산로로 올라가는 길에 우체국이 있어서 가끔 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들르시는 경우도 종종 있다.


라? 그런데 두 분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어딘가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알코올 냄새. 아무래도 산에 다녀오신 뒤 인근 식당에서 술을 드신 모양이다. 단풍구경을 하신 건지 술 구경을 하신 건지 온통 빨갛게 되신 얼굴. 고객님이 천천히 창구로 다가수록 더욱 진해지는 향기. 아, 제발 부탁이니 거리를 유지해주세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시면서 고객님은 내게 물으신다.


“저, 화장실 좀 써도 됩니까?”




주민 피셜로 산도 좋고 물도 좋고 공기도 좋다는 마을. 실제로도 그렇긴 해서 산 곳곳에 이름 난 절도 있고, 근처에는 인스타 감성 듬뿍 나는 카페나 유명한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아니, 이 깊숙한 산 동네에 뭐가 그리 볼 게 있다고. 꽃 피는 봄이나 단풍 가득한 가을이 되면 동네에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우체국에 들어오셔서 곧장 창구로 오시지 않고,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는 분들은 거의 백이면 백 관광객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으시며 하는 그 말씀. "여기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버스를 타고 오신 분들이 길을 물어보시기도 하고, 우체국 앞마당에 차를 세우시고 들어오셔서 길을 물어보시기도 하고. 아니, 다른 곳도 아니고 왜 우체국에 오셔서 길을 물으시는 거야? 궁금하던 때가 있었는데, 관공서라 왠지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하시한 고객님의 말을 들은 후로는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다. 굉장히 동의하는 바이다. 나도 길을 알지 못하는 다른 곳에 가면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잘 알려진 명소나 가게  안내를 잘해드리는 편이다. 워낙 찾으시는 분들이 많아서 눈 감고도... 는 무리고, 실눈 뜨면 찾아갈 정도. 하지만 이 마을의 모든 곳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모르는 상호명을 들을 때면 나는 조용히 초록창을 켜서 고객님이 말씀하시는 곳을 검색한다. '여기서 어디 방향으로 가시면 된다. 대로로 쭉 나가셔서 빨간 집이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에 있다' 등등 얼굴과 손을 써가며 열심히 설명드린다. 이 정도면 됐겠지? 혼자 괜스레 뿌듯해하고 있는 내게 또다시 들려오는 그 말씀. "이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은 어딨어요?"


어. 이거는 검색할 방법이 없다. 어디 어디 맛집을 검색해도 나오는 건 딱히 없고, 유명한 곳은 사람이 미어터질 테고. 가재는 게 편이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보통은 점심때 자주 가는 가게를 소개해주곤 한다. (우리 가게 사장님들 돈 많이 많이 버십시다!) 가끔 집배원이 우체국에 계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저런 질문을 하시는 고객님은 정말 운이 좋으신 분들이다. 어디 가게에 어느 음식이 맛있으며, 길은 어디로 가면 붐비지 않으며, 동네의 모든 것을 다 꿰뚫고 계신 사람 가이드북. 그야말로 인간 미슐랭 가이드. 혹시라도 낯선 관광지에서 집배원을 만나면 이 근처 맛있는 곳이 어디인지 한번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




화장실에서 금방 나오신 한 분은 일행이 나오면 앞에 있는 식당으로 오라고 말해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꽤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시는 고객님. 아무리 변비라고 해도 이렇게 오래 안 나오시는 건 문제가 있다. 화장실 문 앞에서 고객님을 불러 본다. “곧... 나갑니다.” 뚜렷하지 않은 목소리. 약간 걱정이 되지만 다시 돌아온다.


10분이 지났다. 이번에는 국장님이 직접 가보신다. 고객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국장님의 목소리만 들린다.

터덜터덜 걸어오시는 국장님을 쳐다본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시는 국장님. 아직 차도가 보이지 않으시는 건가.

또다시 지난 10분. 아무리 밖에서 불러도 대답 없는 그 사람. 화장실에서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변기에서 그대로 잠이 드신 모양이다. 이를 어쩌면 좋지.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식당으로 전화를 건다. 우체국에서 무슨 일로 전화를 했냐고 웃으며 받아주시는 사장님. 이런이런 옷을 입은 손님 안 계시냐고 여쭤보니 지금 바로 앞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까보다는 조금 술이 깨신 모양이다. 분명히 식당으로 오라고 말해달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왜 일행이 안 오냐며 되려 물으시는 고객님. 사정을 설명드리며 화장실에 우리가 들어가서 꺼내기는 좀 그러니 와달라고 말씀드린다.


잠시 뒤 부리나케 우체국으로 달려오신 고객님. 오시자마자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리신다.

“화장실 전세 냈나! 여기서 평생 살 끼가!” 국장님과 내 말에는 반응이 없었는데, 문 뒤에서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나간다! 나가!” 화장실에서 나오셔서 서로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저 멀리 식당으로 사라지시는 두 분. 정말 다행이다. 전화를 안 받으면 어떻게 하지. 일행도 취해서 쓰러져 계시면 어떻게 하지. 술이 깨실 때까지 계속 화장실 밖에서 기다려야 하나. 최악의 경우에는 최후의 방법으로... 다양한 가능성들을 머릿속으로 고민했지만 어떻게 잘 해결되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준비했던 고무장갑(?)을 조용히 내려놓는다.


산도 좋고 물도 좋고 공기도 좋다. 음식도 좋고 술도 좋고 옆에 함께한 친구는 더 좋다.

그러나 뭐든지 간에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

부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지도 않고, 오직 필요한 정도만.

적당한 선을 누리며 행복할 수 있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다.


... 그런데, 아까 그 식당도 술 없이 먹기에는 아쉬울 음식들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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