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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엇비슷 Jan 03. 2021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시간아 흘러라 흘러 그땐 그랬지

한 할머니가 무언가를 품에 안고 찾아오셨다. 소중히 품에 안고 계신 정체불명의 검은 비닐봉지. 안을 확인해 보니 웬 큰 수화기가 달린 전화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이걸 다른 곳으로 보내시려는 거구나 생각하는 내 귀로 들리는 목소리. “며칠 전부터 전화가 하나도 안 돼! 이것 좀 고쳐주시오!” 네? 전화를 고쳐달라고 하신 건가요? 여기는 우체국인데요?


의아한 표정으로 우체국에서는 그런 업무를 하지 않는다고 천천히 말씀드리는 내게, 더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런 거는 체신부에서 해주는 것 아니냐고 얘기하시는 할머니. 뒤편에 앉아 계시던 국장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아이고 고객님! 체신부가 도대체 언제 적 일입니까?”




우체국, 우정사업본부는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이다. 예전에는 미래창조과학부, 지식경제부, 정보통신부 안에 있었고, 현재 민영화가 된 KT(舊.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함께 체신부에 속해 있았다. 지금 내가 있는 우체국 건물은 지어진지 20년이 지났는데, 그전에 있었던 물에는 전화교환 해주는 전신전화국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읍이나 면 같은 시골에는 우체국과 전신전화국이 같은 건물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전화교환원으로 일하셨다던 고객님이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가 가끔 있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때는 일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1층에는 우체국 창구와 집배실 있었고, 계단을 올라가면 전화교환대가 여러 대 늘어서있었다. 커다란 교환대와  몇 백 개나 되는 전화번호들을 달달 외우고, 다른 도시들로 전화를 연결해드리고, 계속 반복되는 야근으로 지치기도 하고, 무례한 사람을 대한 날이면 건물 뒤에서 쪼그려 앉아 울기도 하셨다고. 


그런 얘기를 하던 중 밖에서 오토바이를 세우는 소리가 들린다. 마른 목을 축이러 우체국에 잠시 들르신 집배 팀장님. 집배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으신 분이다. 고객님은 정수기로 가는 팀장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크게 부르신. “서방! 보고도 인사를 안 하니." "아이쿠, 나오셨습니까?" 나이가 지긋하신 집배원 분이 고객님께 반갑게 인사하며 또 다른 대화가 시작된다.


집배 팀장님은 이 마을을 30년 넘게 담당하셨다. 저 깊은 산골짝부터 읍내로 나가는 길목까지 팀장님의 오토바이가 다니지 않은 곳은 없다. 고객님의 름을 물어보면 '어느 동네에 사는 누구다. 아무개 씨네 둘째 아들일 것이다'며 답을 바로바로 하실 정도. 디에 누가 살고 이름이 무엇인지 거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가끔 함께 점심을 먹을 때면,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예전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한다. 제였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지만, 이 마을도 사람이 많이 살았었다. 지금은 폐교되고 다른 용도로 쓰이는 국민학교 건물이 두 군데가 있는데, 그때는 한 반에 학생들이 50 명은 훨씬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눈 감고도 찾아가시는 동네와 길을 예전엔 밤을 새워서 달달 외야 했고,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온 마을을 부리나케 다녀야만 했다. 동명이인의 편지를 잘못 배달한 적도 있었고, 한 동네를 빼먹고 배달해서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매번 옮기는 우편행낭(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그냥 버리고 나도 도망갈까 생각한 적도 있으셨다고.


중간의 실수들은 팀장님보다는 거의 고객님한테 들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 보러 나와서 직원한테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팀장님은 말로는 그러시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잔뜩 배어 있으시다. 지나간 이야기들을 하며 서로 웃음 지으시는 두 사람.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아려오기도 한다.




지금은 철거를 했 우리 우체국 앞에는 공중전화 부스가 하나 있었다. 화기 위에  화번호부도 에 묶여 매달려 있던 게 기억이 난다. 아침에 출근 업무를 시작하기 전 우체국 앞에 떨어진 쓰레기나 담배꽁초를 줍곤 했는데, 공중전화 부스는 아주 노다지였다. 다 먹은 캔 커피 하며 담배꽁초가 뭐 그리 많은지. 가끔 공중전화가 안된다고 우체국에 들어오셔서 고쳐달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으셨다. 왜 우체국에 그런 문의를 하시지 예전에는 이상하게 여겼지만, 여러 이야기를 들은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일반적이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지금의 뚜렷한 기억들도 미래에는 어렴풋한 추억으로 바뀌겠지.

'나 때는 말이야!'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들도 세월이 흐르면 의아하게 여기게 되는, 오래된 이야기로 들리겠지.


그래도,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던 노래 가사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들은 없을 것이다. 오래되고 잊히는 것에 슬퍼하기보다는 이 의미 있는 시간들을,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을 귀중히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누군가의 고루한 옛말이 아닌 나 자신의 소중한 추억들로 간직할 수 있기를. 매일매일의 시간들을 후회 없이 사랑하고 후회 없이 꿈을 꾸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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