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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엇비슷 Feb 05. 2021

나는 내가 특별한 줄 알았어

합격 전의 이야기

'합격한 건가?'

컴퓨터 화면에는 방금 검색한 내 수험번호가 검은색으로 반전되어 깜빡거렸다. 이거 진짠가? 정말로 붙은 게 맞나? 수험번호를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다시 검토해본다. 숫자 모두 정확하게 일치한다.


"합격한 게 맞구나."

혼자 가만히 중얼거려 본다. 뭔가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짜릿함을 기대했는데. 합격했다는 느낌이 그 정도로 팍 하고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직 실감이 안 나는 걸지도 모르고. 핸드폰을 들어 아버지한테 전화를 건다.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라는 멘트. 바쁘신가 보네. 다음 순서는 엄마다. 오늘따라 왜 이리 늦게 전화를 받으시는지. 신호음은 왜 이리 크게 들리는지.


"어. 아들. 왜?" "합격했어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환한 목소리.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몸을 뒤덮는 묘한 느낌. 이번에도 또 불합격이면 어떡하지? 실수를 많이 해서 면접에서 떨어진 게 아닐까? 등등의 걱정들. 매일 밤, 잠도 못 자고 몸을 뒤척이게 하던 염려들이 깜빡거리며 사라져 간다.




나는 내가 특별한 존재라 여겼다. 남들과는 다른 진짜 뛰어난 사람. 다들 한 번은 그렇게 느끼지 않나? 어릴 때 하나쯤은 관심을 보이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고, 그게 나의 경우에는 국기였다.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를 외워서는 흰 도화지에 하나씩 그리는 게 어린 나의 취미였다. 미국, 중국, 일본. 잘 아는 나라들부터 지부티, 차드, 탄자니아. 지구 반대편의 나라들까지.


낯선 나라의 국기를 쓱쓱 그려대는 아들을 보고 감격하셨던 우리 엄마는 나를 꼭 껴안으시고 '신동이나 영재가 아닐까? 정말 대단하다! 우리 아들'이라며 좋아하셨다. 어린아이들에게 다들 으레 해주는 말. 그러나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마음속에 새기고 발전시켰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정말로 뛰어난 사람이야. 난 뭘 하든 잘 되고 성공할 거야!’ 정말 지나친 비약이었다.


언제였더라?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때 유행하던 책이 한 권 있었다. 원하는 것을 간절히 믿고 구한다면 이룰 것이다? 대충 이런 뉘앙스의 책이었다. 그 이후에 나왔던 수많은 자기 계발서도 보통은 비슷한 결론으로 끝을 맺곤 했다.


1. 뚜렷한 목표   

2. 그것을 이루기 위한 간절함


나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 의미 없이 느껴졌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간절함을 품고 행동해야 한다고?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 나는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만 충만해 있었다. 왜냐고? 나는 특별하니까! 남들과는 다르니까! 시간이 지나가며 더욱 굳게 뿌리 박힌 믿음.

몇 번인가 이 믿음을 지워버릴 만한 일들이 있긴 했다. 원하던 대학에 떨어진 일. 오래 준비했던 대회에서 나쁜 결과를 얻은 일 등. 그러나 그 모든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바꿔버린 마법의 한 마디. '내가 제대로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그냥 막! 어?'  현실적 근거가 없는 낙관적인 태도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언젠가 들었던 상담사의 조언은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어영부영 나이는 먹어가고, 그래도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시작한 공무원 시험. 그러나 뭐라도 했던 건 공부가 아니었다. 독서실에 교재만 그럴듯하게 펼쳐놓고, 비싼 학원비는 그대로 노래방과 PC방에 갖다 바쳤다. 의미 없는 나날들. 그렇게 1년이 지나가도 괜찮았다. 왜? 나는 특별한 사람임이 분명하니까. 지금은 잠시 나를 위해 쉬는 시간이야. 시중에 쏟아지는 위로의 글들. ‘넌 잘하고 있어.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정말로 나는 내가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




여느 때처럼 PC방에서 밤을 새우고 오전 10시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머니에 진동이 느껴졌다. 액정에 찍힌 아버지의 전화번호.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연락을 하신 걸까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 그는 다급한 말투로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으며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말했다. 뭐지?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어머니와 함께 달려간 대학병원 응급실. 입구에는 뇌졸중을 조심하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었고, 아버지는 응급실 가장 안쪽 침상에 누워계셨다. '그냥 피곤했던 것뿐이다. 아무 문제없다. 조금만 쉬면 된다.' 전혀 되지도 않고, 문제가 있어 보이고, 그냥 피곤한 게 아닌 모습의 아버지는 애써 우리들을 안심시키고 계셨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모습이 다가왔다.' '그 넓던 아버지의 등이 너무나 좁아 보였다.'

인터넷에서 수없이 나오는 부모님을 향한 후회와 눈물의 글. 그런 글들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로 '효도할게요ㅠㅠ'를 적어가며 인터넷에서만 효자인 척했던 사이버 효자는 그제야 현실을 마주했다. 염색으로도 덮을 수 없는 흰머리, 어느새 늘어난 주름들과 쭈글쭈글해진 손등. 부쩍 수척해지신 얼굴과 웃음기를 잃으신 표정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으신 걸까.



그날 밤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적어보았다.

먹고 놀기만 해서 뒤룩뒤룩 찐 살덩이.

그냥 그런 학점에 그 그런 스펙들.

뭐 하나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란 사람.


넌 잘하고 있어.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내가 좋아했던 글귀들.


아니다.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정말 절망적이었다. 나는 특별하지 않았다.

정말로 남들과 달랐다면, 뛰어났더라면. 우리 가족들은 행복했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혼자 자책하며, 입을 막고 소리를 삼켜가며 울었던 그날 밤. 영원하리라 믿었던 믿음은 많이 지워져 있었다. 할 거 없으면 남들 다하는 공무원이라도 하자던 애매한 목표. 그런 목표라도 있었기에 공부를 다시 했던 시간만큼은 그나마 조금 간절했었다. 물론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 조금 우여곡절이 있긴 했었지만, 3년의 세월, 그 결과가 지금 컴퓨터 화면 안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소식을 들으신 아버지는 소고기를 사 오셨고, 우리 가족은 네모난 식탁에 둘러앉아 고기를 먹었다. 괜히 고기를 굽겠다고 설치다가 몇 점을 태워 먹은 후 집게와 가위는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별 시답잖은 얘기로도 좁은 거실은 웃음소리로 가득 넘쳤다. 흰머리와 주름이 조금씩 더 느셨지만 환하게 웃으시는 부모님의 모습. 나는 그게 참 맘에 들었다.


잠시 바람을 쐬고 온다며 밖으로 나갔다. 여름이 다가오는 밤의 골목길. 이제 그다지 어둡지도 춥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을 간절히 믿고 구한다면 이룰 것이다' 좁은 골목을 지나 큰 길가로 나가며 책의 내용을 조용히 읊조린다. 애매하긴 했지만 어쩌다 보니 이루게 된 공무원이라는 목표. 그걸 이룬 나에겐 또다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우리 가족이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간절함. 그 간절함이 내가 이제 마주칠, 만나게 될 일들보다 더 강하길. 나의 직장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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