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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Nov 14. 2022

이후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나는 오랜만에 교회에 갔다. 그때 나는 방언기도로 신과 단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하느님 아버지, 제 육신의 아버지를 살려만 주시면 원하시는 대로 뭐든지 다 할게요."


곧 죽을 줄 알았던 아버지는 살아났다. 나는 내 기도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난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도를 할 땐 몰랐다. 아버지는 뇌를 다쳐서 예후가 좋지 않았다.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는 파우스트 박사에게 거래를 제안하지만, 이번엔 악마나 신이 제안한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제안한 거래였다. 그래도 나는 억울했다. 생과 사에서 '생'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살아난 내 아버지가 온전한 '생'이라 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태가 되길 원치는 않았기에 신에게 실망했고 교회를 아예 나가지 않았다. 신의 뜻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 뜻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 후 나는 불행을 겪을 때마다 그때 내가 '신과 맺은 잘못된 거래'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인격신을 믿지 않은지는 오래되었다. 대신에 '명사'가 전해줄 밝은 미래를 믿곤 했다.

대학교 땐 '취업'만 되면 (밝은 미래가) 이뤄질 거라 믿었다.

글을 쓸 땐 '등단'만 되면 이뤄질 거라 믿었다.

등단 후 무명이 길어지자 '책'만 내면 이뤄질 거라 믿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몇 년 후 꼽아 보니 다 이루었더라. 다만 옛날의 나는 착각했다.

'취업'만 하면 승승장구할 줄 알았고,

'등단'만 하면 승승장구할 줄 알았고,

'출판'만 하면 승승장구할 줄 알았다.

아버지가 생과 사에서 '생'으로만 돌아오면 완전한 생이 이뤄지는 줄 착각했던 것처럼.


대학 졸업 전에 취업을 했지만 당시 내 상사는 '그 밑에서 2년 넘게 견뎌낸 사람이 없다'는 XXX였고,

등단하면 유명 작가가 될 줄 알았는데 원고 청탁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아무도 내가 등단한 줄 모르고,

책만 내면 작가로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무명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가 믿어야 할 것은 명사가 줄 밝은 미래가 아니라, 명사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굳건히 대처할 나의 준비 상태를 믿어야 했다.


'전에 당해놓고 또 그런다.'

퇴사 이후 어떤 '명사'로 상징되는 미래를 다시 꿈꾸고 있다. 그럴 때마다 이전 경험에서 학습이 덜 된 내게 욕을 해준다. 그래도 다행히 이제는 '명사'만을 믿진 않는다. 앞으로 '명사' 근처에도 못 가고 고약한 불운이 계속될 수도 있고, 어렵사리 '명사'를 이룬 후에 갑자기 불운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명사'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고 믿는다. 이제 '명사' 이전과 이후의 '암흑'까지도 믿음 안에 둔다. 별이 더 빛나 보이는 이유는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적적했던, 칠흑처럼 어두워 두렵기만 했던 검은 우주 덕분이다.


나는 별이 되거나 별 근처에 어둠으로 머물고 있겠지. 나는 존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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