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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Mar 05. 2023

다짐 세 가지



언니에게 조카 선물을 사주겠다고 그러면 매번 1~2만 원 대 장난감 링크를 보내준다. 더 비싼 거 없냐고 물어도 항상 그 정도 가격대다. 요즘 조카가 갖고 싶어 하는 거라며. 그걸 사들고 크리스마스나 조카 생일 때 언니 가면 나는 언제든 산타클로스가 다.

 

조카가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입학 선물인데 1~2만 원은 너무 저렴하잖나. 이번엔 현금을 보냈다. 언니가 고마워, 하고 받고는 재차 카톡을 보냈다.


왜 이렇게 많이 보냈어?

응? 지난해 입학한 00(다른 조카)한테도 똑같은 금액 보냈어.

네 상황이 작년과 같냐?

...

아껴 써!


왜 이렇게 많이 보냈어?


퇴사한 이모는 조카 입학 선물 많이 보내면 안 되는 걸까?

퇴사 당시 다짐 '기부 유지하기'와 '꾸준히 여행하기'다. 현재 매월 기부처가 세 곳이다. 기부를 시작하기 전 나름 세상이 나아지길 기대하며 시작한 곳들이다. 아직은 유지하고 있다. 국내 여행도 자주 가고 있다. 이번에 한 가지 더 늘었다. 조카 선물하기. 매월 기부를 하고, 자주 여행을 하고, 조카 생일이나 입학졸업 때 선물을 보낼 정도를 유지하기. 이런 목표가 오히려 나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을 거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일하는데 두 가질 내세울 생각이다.

'적당한 자존심 유지'와 '때론 자존심 상해하지 않기'.

사실 퇴사 전 내가 할 수 있는 일거리를 뽑아봤다. 일용직을 포함해서 50여 개는 할 수 있겠더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일용직 포함하면 누구나 다 그 정도 뽑을 수 있다.) 그 일들을 다 뽑아본 후 이런이런 일을 할 땐 자존심을 빼고, 이런이런 일을 할 땐 자존심을 유지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니까 내 자존심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때론 자존심을 유지하지만, 때론 유지하지 않는다. 며칠 전 원고 청탁 들어온 곳이 원고료가 말도 안 되게 적다. 이건 너무 하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하고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청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일단 답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뭐라고. 그런 청을 하는 사람도 원고료로 거절당하면 자존심 상할 테니 일단 감사한 마음을 갖기로.

하지만 국내 원고료는 너무 말도 안 되게 책정되어 있다. 그 원고료 기준도 안 되는 고료를 내미는 곳을 접할 때면(아주 많다) 서로 민망해진다. 힘드시죠?, 하고 함께 울어야 할 것 같은 현실.


그러니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일거리를 몇 군데 찾았다. 내가 티끌임을 인정하고 소소하게 할 수 있는 일. 그래도 적당한 자존심 유지를 위해 지키는 건 있다. 티끌 메일로 얼마 전 '대필 작가 하실래요?' 메일 보내신 분이 있다. 나의 퇴사 이야기를 읽은 독자이시니까 그 말에도 감사하지만 아직 내가 지키는 적당한 자존심의 기준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필은 자존감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굳이 퇴사할 이유가 없다. 퇴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가 공통 목적으로 퇴사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자존심이나 자존감을 지켜가면서 나는 돈벌이를 가질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 볼 때 할 수 있것 같다.

<다음소희>라는 영화가 상영 중다. 콜센터 사건을 다룬 이 영화를 나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몇 년 전 퇴사를 하고 콜센터 알바를 했을 때 기억이 떠오를까 봐서다. 소위 명문대 출신도 아닌 대졸일 뿐이었는데 그때 같이 일하는 언니들은 너는 왜 그 대학을 나와서 여기서 콜센터를 하고 있느냐고 물다. 니들은 가정 내에서도 회사 내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콜센터엔 생각보다 얼굴 모르는 여성에게 시 x 욕을 하기 위해 전활 거는 사람이 많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듣는다. 모두 남자였다. 술 취한 경우 절반이 넘는다. 나는 내 얼굴도 모르고 욕을 하는 그들을 오히려 불쌍하게 여겼다. 내게 욕을 하는 저 사내를 향해 느긋하게 생각했다.

'저 인간은 내가 실물로 접하면 얼마나 지적으로 생겼는지 모르지 않나, 아마 날 실물로 보면 깨갱할걸.'

그때 난 이런 '근거 없는 자존감' 하나로 버텼다.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을 굳이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조카에게 가끔 저렴한 선물해 줄 정도의 재력 정도는 유지하며 살고 싶다. 내겐 아이도 반려견도 없는데 조카에게 선물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존심의 양을 조절해 가며 벌이를 유지할 생각이다.  




*여행 때문에 다음주는 한 주 쉽니다. 잘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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