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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돈의 환율, 지금의 가치

캐나다 밴프 국립공원 산책 가이드

꼬박 7일 동안 약 4천 킬로미터를 달려 어제 밴프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그렇게 고대했던 캐나다 로키산맥의 한 자락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상쾌했다. 여름의 한가운데임에도 시원한 아침 공기가 나의 심신 역시 신선하게 만들어 주었다. 역시 밴프에서 호텔보다 캠핑을 선택하길 참 잘했다. 밴프 국립공원의 캠핑장에는 베어 박스라는 게 있다. 야생곰이 먹이를 찾아 내려왔을 때 음식을 찾기 위해 텐트를 습격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한 박스 안에 음식을 따로 보관하는 것이다. 외출 시나 취침 시에는 항상 음식물을 차량이나 이 베어 박스 안에 넣어두는 게 좋다.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쓰레기 봉지도 야생동물이 모두 헤집어 놓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던지 음식물처럼 안전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밴프에서는 야생곰을 보는 일이 꽤 흔한 일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아쉽게도 곰을 만나지는 못했다. 아침은 참치 김치찌개에 누룽지로 정했다. 오랫동안 즐겨 먹었던 메뉴지만 밴프 국립공원에서 로키산맥을 바라보며 먹으 니 그 의미와 맛이 또 다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디서" 일 수 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누구와 함께"일 수도 있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왜?"가 아닌가 싶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밴프 국립공원을 여행할 계획이다. 우리 캠핑장이 있는 곳은 밴프 타운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밴프 국립공원의 한 캠핑장이다. 설퍼산까지는 약 8km, 미네완카 호수까지는 15km, 거기서 레이크 루이즈까지는 또  70km 정도가 떨어져 있다. 밴프 국립공원의 크기는 말 그대로 광활하다. 지도에서는 각 명소들의 위치가 제법 가까워 보여도 실제로 다녀보면 이동거리가 꽤 된다. 밴프 타운에서 루이즈 호수만 왕복해도 100km가 넘으니 말이다. 그래서 밴프를 여행할 때는 효율적인 동선을 짜는 게 중요하다. 밴프 타운을 기점으로 첫날에는 설퍼산과 근교 호수들을 둘러보고, 둘째 날에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따라 제스퍼까지 북쪽으로 여행하는 코스가 제일 일반적이다.


우리 역시 가까운 순서로 동선을 짜고 그중 오늘의 첫 번째 코스인 설퍼산으로 향했다. 어제 방문했던 온천 바로 옆에 설퍼산 정상으로 닿는 곤돌라 탑승장이 있다. 이 곤돌라를 타면 터미널에서 정상까지 약 700미터 높이를 단 8분 만에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산이라 하면 자고로 시간을 들여 오르고 올라야 맛이다. 밴프에는 좋은 트레킹 코스가 많기 때문에 일주일 이상 장기로 머물 계획이라면 꼭 트레킹을 해볼 것을 추천한다.


우리가 밴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2박 3일 정도로 트레킹 코스를 돌아보기엔 조금 촉박하여 이번에는 시간을 아끼고 돈을 쓰기로 결정했다. 여행은 우리 인생이 그렇듯 항상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가 몬트리올에서 밴프까지 차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이곳에서 2박이 아니라 일주일을 머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설퍼산도 트래킹으로 둘러보고 밴프에 머무를 시간도 충분했겠지. 길에 그렇게 시간을 버려놓고 설퍼산까지 트래킹을 하는 반나절의 시간은 아까운 걸까? 정답은 없다. 세상 단순해 보이는 일도 '시간'이라는 개념이 대입되면 그때부터는 상당히 복잡해진다. 나에게 주어진 이번 한 달 동안의 시간에 내가 더 보고 싶은 건 길 위의 풍경 쪽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밴프에 와서 일주일의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건 지금이 아니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자동차를 타고 몬트리올과 밴쿠버를 왕복하는 1만 킬로미터의 로드트립은 지금이 아니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선택하려 하는 편이다.   



그래도 희소식 하나는 밴프의 액티비티 상품들을 패키지로 구매하여 할인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뉴욕 역시 여행을 가면 2층 버스 투어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인상 등 명소들의 입장권을 한대 묶은 뉴욕 패스라는 걸 판매한다. 이런 관광 상품을 잘 이용하면 매 장소에 갈 때마다 줄 서고 표 사는 시간을 아끼고 가격 역시 할인받을 수 있어 일석이조다. 우리는 설퍼산 곤돌라와 콜럼비아 빙원 설상차 투어, 미네완카 유람선 투어 등 총 네 가지 코스가 포함된 패스를 선택했다. 절대적으로 보았을 때 패스의 가격이 저렴한 건 아니지만 여행지마다 한 번은 꼭 경험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패스를 구매할 때는 코스의 개수와 퀄리티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좋다. 하루에 너무 많은 관광지를 돌게 되면 사진은 많이 남을지 몰라도 마음에 남는 것들은 별로 없게 된다.



백만 불짜리 전망을 보며 마시는 7천 원짜리 맥주


나름 아침부터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설퍼산 곤돌라 입구에는 관광객이 이미 가득했다. 아 물론 가득하다고 해봤자 한국의 관광지 인파에 비교해서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곤돌라에 올랐다. 맑고 청명한 날씨 덕에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풍경이 너무 기대가 된다.



4인이 탈 수 있는 곤돌라는 우선 탑승하고 나면 빠르게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데, 고도가 점점 올라갈수록 사물은 작아지고 풍경은 넓어진다. 탑승장에서 멀어질수록 나무와 사람은 점이 되고 산이 아니라 산맥이 보이게 되는데 그 순간이 너무 아름다워 어이없이 감탄만 연신 하게 된다. 산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나무들이 벤프의 공기가 왜 그렇게 좋을 수밖에 없는지 자연스레 설명해준다. 지난밤 오랜만에 마신 소주에도 숙취 없이 머리가 맑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 이리다. 곤돌라에 함께 탑승한 미국 관광객들과 몇 마디 인사만 나누었는데 어느새 정상에 다 달았다.




곤돌라에서 내리면 10분 안팎의 짧은 하이킹으로 산 정상 전망대까지 도달할 수 있는데, 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아이들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수준이다. 전망대 데크에 오르면 로키산맥에 둘러 쌓인 밴프 타운과 그 사이를 흐르는 에메랄드 빛 호수와 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물론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그 풍경 안에 있을 때는 그것들이 이루는 하모니가 얼마나 웅장한지 알 수가 없다. 인간이 왜 그렇게 높은 곳에 오르려 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걷다가 어딘가를 하염없이 신기하게 바라보는 여행객 무리를 만난다면 발을 멈추고 함께 그 시선을 쫓아보자. 그 시선의 끝에는 어김없이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이름은커녕 모습조차 생소한 친구가 볓좋은 곳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 야생동물들. 그리고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공생하고 있는 모습들. 벤프에선 아직 그런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다람쥐는 종횡무진 관광객 곁을 떠돌며 먹을거리를 요구한다. 너무나도 깜찍하게 앞발을 들고 나를 응시하면 정말 가방 속 뭐라도 하나 꺼내 주어야 할 것처럼 마음이 약해진다. 하지만 캐나다에선 야생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사는 게 순리이다. 당장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이 야생동물과 인간이 공생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런데 디즈니 많화에서 금방 튀어나왔을 것 같은 다람쥐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과 가방을 열어 먹이를 얻을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겁도 없이 사람의 무릎 위로 거침없이 올라 공손하게 손을 모으면 누구나 마음이 사르르 녹고 만다.


설퍼산도 식후경이라고 설퍼산의 에는 간단한 음료부터 풀코스 정식까지 멋진 로키산맥을 배경 삼아 맛볼 수 있는 실내 전망대와 레스토랑이 있다. 그동안 수많은 전망대에 올라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은 뷰를 가진 레스토랑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캘거리 타워에 올라 조망한 인간들이 만든 도시 숲과는 전혀 다른 뷰를 보면 나도 모르게 "신선놀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런 뷰를 보면서 맥주를 한잔 기울이는 경우를 그것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네 글자는 없다. 




사람, 건물, 물, 모두 지나온 시간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설퍼산에서 내려와 향한 곳은 벤프의 고급 리조트 호텔인 페어몬트 밴프 스프링스다. 이 호텔은 1888년에 지어졌다. 10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아직 현역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식 건물들과 견주면 조금 구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아무리 비싼 인테리어 자제도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이 주는 멋이다. 사람이던 건물이던 그 지나온 시간을 담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에 페어몬트 계열의 호텔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우리에게 제일 잘 알려진 건 퀘벡시티에 있는 페어몬트 르 샤토 프롱트나크 호텔이다. 몇 해전 인기리 방영되었던 드라마 <도깨비>의 단풍국 배경이 된 캐나다 퀘벡주의 퀘벡시티 구시가지에 위치한 호텔이다. 드라마 안에서는 주인공인 공유 소유의 호텔로 나왔었다. 전부터 세계적인 셀럽이나 정치인들이 퀘벡을 방문했을 때 머무는 퀘벡의 랜드마크 같은 호텔이다. 두 번째는 오타와 국회의사당 옆에 위치한 오타와 페어몬트 샤또 로리에 호텔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로비에만 들어서도 내가 귀족이 된듯하다. 세계적인 사진가 카쉬의 작품들이 로비에 전시되어 있어 오타와에 들린다면 꼭 한번 가볼 만한 명소다. 그리고 내가 세 번째로 방문하게 된 페어몬트 계열의 호텔이 바로 벤프의 이곳이다.


호텔의 유명세만큼 숙박비가 비싸서 머물기가 부담되지만  꼭 숙박하지 않더라도 고풍스러운 호텔 내부를 구경하고 커피나 바에서 칵테일을 한잔 하는 것도 좋다. 외국인이 한국 여행 왔을 때 신라 호텔이나 하얏트 호텔 투어를 가지는 않지만 캐나다에서는 좋은 호텔들이 여행객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 볼거리를 제공하는 건 흔한 일이다. 샤토라는 뜻이 불어로 성이란 뜻인데, 성의 형태로 지어진 이런 옛 호텔들은 건물 자체로 문화적 유산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 호텔은 평범한 공중전화박스마저 너무 아늑해 보인다. 드라마 속의 공유가 문을 열고 갑자기 공간이동을 하듯이 고풍스러운 문을 열고 나가보았더니 정말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벤프를 배경으로 펼쳐진 수영장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이곳에서는 신선놀음이 일상인 곳 같다. 사람의 창조물을 자연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페어몬트 밴프 스프링스 호텔은 최소한 벤프의 그 풍경에 잘 묻는 멋진 작품이었다.




페어몬트 밴프 스프링스 호텔 뒤로는 보우강이 이어지고 조금만 걸으면 보우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지도가 없어도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강과 조우할 수 있다. 록키산맥의 빙하가 녹아 흘러 만들어진 보우 강의 에메랄드 빛 강물은 탄성을 불러냈다. 굳이 발을 물에 담가보지 않아도 이미 시원함이 느껴진다. 그 물에 발을 담그며 낚시를 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지금부터는 만년설에서부터 녹아 흘러내려온 이 물의 근원을 찾아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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