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오늘 밤 우리 어디서 자지?

모든 살림살이를 차에 싣고 밴쿠버를 향해 떠난 1일 차

횡단


[명사] 1. 도로나 강 따위를 가로지름.

         2. 대륙이나 대양 따위를 동서의 방향으로 가로 건넘. 


월급을 탈 때마다 하나씩 장만했던 우리의 살림살이들을 중고 사이트에 모두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안방에 있던 침대가 낯선 미니밴의 지붕 위에 실리고 우리 집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처음 우리가 이사 왔을 때처럼 안방엔 다시 흰 벽만 남았다. 안방에 텐트를 치고 침낭을 펼쳤다. 우리의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캐나다에서 계획했던 2년간의 생활이 일단락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말 멋진 추억을 하나 만들 계획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캐나다 동부 퀘벡주의 몬트리올이라는 도시. 몇 년 전 드라마 도깨비에 나왔던 호텔에서 약 두 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다. 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 나는 캐나다는 영어만 사용하는 국가인 줄 알았다. 사실은 아니다. 캐나다의 퀘벡이라는 지역은 불어를 쓴다. 프랑스에 의해 개척된 도시기 때문이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정부는 떠났지만 퀘벡을 개척한 프랑스인들은 그 땅에 남겨졌다. 퀘벡주 자동차 번호판에 새겨진 "Je me souviens"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퀘백콰들의 의지이다. 몬트리올은 퀘벡에서 제일 큰 도시이며 캐나다 제2의 도시이다. 불어권이라 이민, 유학, 워킹홀리데이를 원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있지만 퀘벡은 멋진 자연환경과 프랑스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매력적인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퀘벡의 제일 큰 도시인 몬트리올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토론토에서 약 500km, 뉴욕에서 600km 떨어져 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 모자이크 컬처를 가지고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나는 이 도시에서 2년을 살았고 내일 이곳을 떠난다.



몬트리올에서 4,500km 떨어진 밴쿠버까지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갈 생각이다. 문짝 두 개에 수동기어가 달린 작은 이탈리아 소형차를 타고 말이다. 한국의 경차보다 약간 큰 이 차에 아무리 차곡차곡 실어도 짐들이 도대체 정리가 되지 않는다. 4인승이라고 하기엔 조금 송구스러워 뒷좌석을 접어 아예 짐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번 여행은 캠핑 +로드트립 형태의 여행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이 작은 차에 모두 실려있다고 할 수 있다. 지붕이 되어줄 텐트와 밤새 온기를 지켜줄 침낭, 쌀은 집에서 먹다 남은 20kg짜리 포대를 그대로 실어버렸다. 냄비와 식기들 역시 여행이 끝나면 버릴 생각으로 집에서 사용하던 것들을 그대로 챙겼다.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트렁크 안에서 제법 여행생활자 냄새가 났다. 2년 동안의 캐나다 생활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게 너무 알차다고 생각했다. 솥에 지은 밥을 누룽지까지 싹싹 긁어먹고 숭늉까지 제대로 한솥 끓여먹는 느낌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정한 건 "밴쿠버까지 간다"그 외에는 다장 오늘 밤 어디서 잘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런 무계획 여행이 자신감에서 온 건지 무모함 일지는 차차 두고 볼 일이다. 


새벽 여섯 시부터 일어나 짐 정리를 마무리하고 2년 동안 살았던 우리의 아파트와 작별을 고했다. 몬트리올 생활의 마무리와 여행의 시작이 교차되면서 약간의 멜랑꼴리 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이 끝난 후 돌아올 곳이 없다는 기분은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일까? 처음 캐나다에 와서 이민생활을 시작할 때는 마치 끝을 모르는 터널을 무작정 달리는 기분이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어 밝은 태양 아래를 좀 달리나 싶었는데, 앞에 또 다른 터널이 보이는 기분이랄까? 이번 터널은 또 얼마나 길지.


본격적인 출근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부드럽게 몬트리올을 빠져나간다. 1.4리터의 작은 엔진이 카랑카랑 돌아가며 한 여름 오전의 아직 달아오지 않은 아스팔트를 신나게 뒤로 보내버린다. 몬트리올 섬을 빠져나가면 휴게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동안 기어를 5단에서 바꿀 일이 없다. 뻥 둘린 길을 크루징 하며 몬트리올의 빌딩 숲이 멀어지기를 바라볼 뿐이다. 한동안 퀘벡의 프랑스어 이정표가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이 알파벳 표기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는데 언제가 부터는 집에 왔다는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몬트리올 안녕!!



다행히 오전 날씨는 좋았다. 하루 최소 600km 이상을 운전해야 하고 숙박을 캠핑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 날씨는 상당히 중요했다. 여행 신이 나의 여행을 반기는지는 아마 날씨를 보면 알듯하다. 여행의 시작에 만난 기분 좋은 할아버지와 올드카. 백발의 할아버지께서 저 차와 함께 달렸을 시간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도 우리의 여행도 정말 풋풋한 애송이처럼 느껴졌다. 무리해서 과속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달리는 것만 봐도 무언가 세월의 연륜을 담은 아우라가 있는 올드카였다.


온타리오에 들어서 첫 휴게소에 들렀다. 북미를 가로지르는 횡단 여행을 한다면 맥도널드에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처럼 변변한 휴게소가 없는 이곳에서 맥도널드는 끼니와 화장실을 해결하는 고마운 장소다. 맥도널드에 가면 말 그대로 커피도 있고, 맥모닝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Wifi도 있다. 매일매일 다른 곳을 달리지만 같은 간판을 수시로 볼 수 있어 뭔가 마음이 놓인다. 몸과 마음을 녹이고, 속을 비우고(?) 채울 수 있는 횡단 여행자의 안식처 같은 곳이랄까??





한번 쉬고 나면 또 두어 시간은 신나게 달려야 한다. 온타리오의 토론토에 3개월 정도 살기도 했었고 여행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온타리오주를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로 했다. 안 가본 길을 달려야 정말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될 것 같아서다. 그러나 온타리오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를 보고 벌써 온타리오주라고 좋아했던 것도 잠시, 남은 하루를 종일 달려도 온타리오주를 벗어날 수 없음에 새삼 캐나다의 크기를 실감했다.


변화무쌍한 날씨 역시 대륙을 달리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금방 화창한 날씨를 달리다가도 갑자기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을 감지하다 보면 어느새 먹구름이 우리 머리 위를 덥고 있고, 이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자동차 루프 위에 떨어지는 소리로 빗방울의 크기까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어느샌가 너무도 분명하게 먹구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 고난도 곧 끝날 거라는 확신이 든다. 역시 금세 비는 그치고, 깨끗해진 도로 위를 먹구름 사이로 비추는 드라마틱한 빛 내림을 받으며 달린다. 횡단하며 이런 날씨를 만나는 날이 많았는데 덕분에 우리의 횡단 여행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도무지 중간이란 없는 극단적이고 예측 불가한 캐나다의 날씨 변화에 나는 계속 "와~"라는 감탄사밖에 내뱉수 없었고, 덕분에 자연 앞에서 하찮은 내 어휘력을 실감했다.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와 대표도시 토론토는 일정상 그냥 지나쳤지만, 그 후로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는 작은 도시 계속 거쳤다. 아메리카라 하면 높고 웅장한 도시들을 항상 먼저 떠올렸지만 사실 미국이던 캐나다이던 우리가 흔히 시골이라고 생각하는 작은 마을들이 더 많다. 고층 빌딩은커녕 3층 넘는 건물도 찾기가 힘든 한적하고 여유로운 그런 곳. 맥도널드나 버거킹 같은 패스트푸드점 한 두 곳만 있어도 그건 꽤나 규모가 있는 도시다. 집만 몇 채 모여있는 마을부터 작은 주유소 하나 달랑있는 마을까지 우린 지도에서도 찾기조차 힘든 수많은 마을들을 지났다. 누군가는 이런 작은 마을들을 두고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라고 표현했겠지. 화려한 네온사인이 가득한 대도시에 비하면 이런 마을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그곳에는 학교가 있었고 도서관도 있었고, 교회와 묘지도 있었다. 사람이 나고 자라고 신념을 갖고 다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한 동네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을마다 항상 있었다. 그게 최소 마을의 생성 조건인 것처럼.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까지 와서 굳이 저런 소박한 마을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저런 작은 마을에까지 관심을 주며 여행할 수 있는 우리가 상당히 부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뉴욕의 큰 건물들도 수초만에 픽픽 쓰러지는데, 그런 영화에 익숙해진 우리는 대서사적인 이야기에만 흥미를 가지는 버릇이 생겨 실제 저런 집 몇 채 쓰러지는 건 뉴스거리도 안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우 소박하고 평범한데도 말이다. 자극이 없으면 지루함을 쉽게 느끼는 현대인은 가끔 소박함에서 재미와 아름다움을 찾는 훈련이 필요하다.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저 초원에 곱게 정리된 짚단 더미마저 소소한 영감을 주었다. 그런 작은 이야기와 시간들이 모여서 나름 장대(?)했던 우리의 횡단 여행을 완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소박한 풍경들만 만난 건 아니다. 소박한 풍경에도 자세를 낮춰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실제로 캐나다 곳곳에는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지만 입을 벌어지게 하는 풍경들이 많이 있었다. 온타리오주를 지날 때는 바다 같은 호수와 강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그 절경의 경치 경치마다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잠시 차를 세우고 왠지 먹먹한 마음으로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저 그 길 위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경탄을 자아내는 곳이 많이 있었는데, 우선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확 뚫린 길을 만날 때가 그랬다. 이 길모 양대로 지구가 두 토막이 날 것 같은 그런 길 위를 우리가 달리고 있었다. 길과 나무 그리고 그 위의 몇 대의 차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길을 끝도 없이 달렸다.

특히 저 언덕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는 마치 롤러코스터의 정상에 섰을 때처럼 두 손을 하늘 높이 올려야 될 거 같은 짜릿한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저런 웅장한 숲을 만든 자연도 대단하지만 거기에 길을 뚫는 인간도 만만치는 않구나. 그렇게 우리는 몇 번의 비를 더 만나고, 또다시 맑은 해님과 하늘님을 만나며 온타리오주를 벗어나려고 열심히 애를 써봤다.

아직 첫날 캠핑을 할지 호텔에서 숙박을 할지조차 정하지 못했는데 오락가락한 날씨는 우리를 더 갈팡질팡하게 했다. 서드베리와 수세인트마리 중간쯤 어디, 몬트리올로부터 829km 정도를 달려왔을 때 이젠 오늘 일정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때 우연히 캠핑장 사인을 발견했다. 오늘 밤은 이 캠핑장이 우리 집이다!



퀘벡주 외에 있는 특히 사설 캠핑장은 더더욱 처음이어서 어렴풋한 가격정보조차 없는 상태였다.

다행히 들어갔을 때 시설도 분위기도 좋았고 가격도 30불대로 생각보다 저렴했다. 그렇게 캐나다 횡단의 첫날 베이스캠프가 정해졌다. 우리 캠핑 사이트를 도착하여 피아트 500의 트렁크를 열었을 때 헛웃음이 났다. 천장까지 짐이 가득 차서 룸미러로는 후방이 보이지도 않는 이 상태로 오늘 800km를 달려왔고 앞으로 4000km 정도를 더 달릴 예정이다. 남은 거리도 힘을 내보자.


캐나다 횡단 1일 차.

총 주행거리 829.3km







이전 01화 여행이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