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를 잘 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오만하기 짝이 없어서 시를 읽고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면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만한 시를 쓴 사람을 욕하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 더 잘 써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수강한 시 수업에서 내가 시는커녕 시의 언어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시라고 써왔던 것이 그저 짧고 유치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이후로 시를 대할 때면 한없이 작아졌다. 다른 차원의 언어로 담기고 다듬어진 낱말과 이미지들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에게 시는 거대하고 또 어려운 것이 되었기에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시를 만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감히 시인을 탓하지 않는다. 막연한 경외감을 마음에 매달고 나의 무지를 살핀다. “분명 시인은 고귀하고 멋진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한 걸 거야”라고 생각한다.
자세를 낮추자 어떤 시들이 친근하게 감겨오기도 했다. 때때로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몸이 먼저 이해한 듯 반응하는 시들이 있다. 신기하게도 안희연 시인의 시집을 처음 접할 때마다 그랬다. 작년에 뒤늦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을 읽을 때도, 최근에 또 뒤늦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읽을 때에도 읽다 보면 영문도 모른 채 눈물을 흘리거나 소름이 오소소 돋거나 몸이 떨리기도 했다.
특히 이번에 읽은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서는 따뜻하고 다정스러운 혼돈과 어딘지 어리숙한 마음들이 녹아든 것처럼 보이는 시들과 만나며 마음이 무척 가까워짐을 느끼기도 했다. 어떤 시 속의 화자들은 매번 길을 헤맨 뒤에 느지막이 어딘가에 도달하는 내 모습과도 닮은 것 같았다. 비록 나의 언어는 아니었으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도 같았다. 너희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을 것이라며 오만한 친밀감을 뽐내고 싶기도 했다.
같은 시집을 며칠 동안 연달아 두 어번 읽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책을 덮으며 시들과 만난 것이 “상하기 좋은 계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했다. 그랬다면 그녀가 시 하나하나에 담은 말과 풍경들이 얼마나 더 싱싱하게 다가왔을까. "모든 얼굴에서 성급히 악인을 보는 내게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 냄새 같은 거겠지 말했다"와 같은 문장이 내게 다가온 날이 모든 것을 얼리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 아니라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