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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ty noodle Dec 31. 2022

이별 후에 남은 것

주말에 이별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아주 오랜만에 데이트가 없는 주말을 앞두고 있다. 3년 넘도록 사귀는 동안 별일 없이 잘 지내던 우리는 별 시답잖은 농담에서 시작된 논쟁을 끝으로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나의 미래에서 그가 사라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관계란 그런 것이다. 까보고 파헤쳐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이 관계에서 어떤 걸 바라고 있는지. 서로의 밑바닥을 보이며 말하지 않는 이상 겉보기엔 멀쩡해 보인다.

산부인과 초음파 진료처럼 6개월에 한 번씩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면서 어디 문제가 있는지, 위험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과학기술이 발전하기를 기대해야 할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다음 연애 혹은 다다음 연애를 기약하며 일단은 오래 살고 보기로 하자.



이별 직후엔 눈알이 빠지게 눈물이 났다. 그의 집에서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야심한 시간에 어두운 골목길에서 다 큰 어른이 우는 모습을 목격한 고등학생은 온몸으로 의아함을 내뿜었다. 그 아이의 존재에 흠칫 놀라고 뒤늦게 부끄러워져 냅다 뛰었지만 그 와중에도 울음은 그칠 수 없었다. 지하철에 앉아서도, 자려고 누워서도, 다음날 일어나서도, 출근 준비를 할 때에도, 지하철을 타러 갈 때에도 무시로 눈물이 났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대단한 적응의 동물인가. 그리고 나는 그중에 또 얼마나 기가 막힌 적응력을 지닌 인간이던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일에 치이는 일상 속에서 마음은 차츰 가라앉았다. 출퇴근길 불시에 쪼록 흐르던 눈물도 언제부턴가 뽀송하게 말라 붙었다. 이렇게 일주일 만에 아무렇지 않아 진다고? 나도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생각했다.



오늘도 여느 저녁처럼 회사를 마치고 휑한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나의 집. 이참에 고슴도치라도 한 마리 들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천천히 외투와 니트와 슬랙스를 벗고 속옷과 양말까지 벗은 다음 샤워 부스에 들어갔다.

"따끈한 물에 샤워 샥 하고 나면 피로가 싹 풀어지지 않아?" 퇴근하자마자 겉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널브러지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물어보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덕분에 좋은 습관 하나 얻었네' 생각하며 거품을 잔뜩 내 샤워를 했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온몸 구석구석 바디로션을 발랐다.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을 거쳐 발을 한 번 감싸 쥐는데 어 잠깐만 이게 뭐지? 오른쪽 발바닥에 무언가 커다랗고 푹신한 것이 느껴졌다. 연한 살과 분리되어 잔뜩 부푼 살껍질, 무좀이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웬 무좀이람? 의아해하다가 지난 주말, 그러니까 우리가 싸우기 전날 밤에 그의 발바닥에 나의 발바닥을 부비며 잠이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함께일 때면 몸 어디 한 구석이라도 더 그와 가까이 맞닿고 싶어서, 잘 때에도 나의 발바닥을 그의 발에 갖다 붙이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겸연쩍어하며 "유라야, 그러다 너 무좀 옮아" 말하곤 했다. 그때는 무좀 따위 옮으면 쫌 어때, 씨익 웃으면서 말하고 일부러 발바닥을 더 바싹 갖다 붙이며 비비적댔다.


아니 그 따위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한창 좋을 땐 옮지도 않던 무좀균이, 왜 하필 지금 들러붙어 온 거야.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에게 전화해 헤어지는 마당에 나에게 왜 이따위 병균을 옮겨주었냐고 따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릴없이 침대에 쪼그려 앉아 물에 불은 발바닥 살가죽을 조심조심 떼어냈다. 기분 탓인지 간지러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으악, 뭐야! 어깨까지 들썩이며 놀랐다. 이별을 하고 난 뒤로, 카톡 알람 소리나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쉽게 놀라곤 했다. 최근에 이별하신 분들, 공감하시죠?

아무튼 화면을 확인하니 엄마였다. 왠지 모를 안도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어, 왜 엄마?" 무심한 나의 대답에 엄마는 무척 서운해하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왜는 뭐가 왜야, 엄마가 딸한테 전화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넌 엄마한테 전화도 안 하고..."  

이럴 때 개기다간 끝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한껏 마음의 자세를 낮추어 대답했다. "알겠어, 미안해 엄마. 내가 요즘 이직하고 너무 바빴어." 그러자 엄마 역시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주말엔 집에 좀 와, 와서 저녁 먹어"


내가 헤어진 걸 엄마가 벌써 알리가 없는데 귀신같이 주말 약속을 잡으시네, 속으로 생각하며 "엉, 알겠어"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뭘 좀 준비해 놓을까?" 묻길래 "오랜만에 엄마가 해준 샤부샤부가 먹고 싶네"하고 대답했다.

엄마는 모처럼의 주문에 신이 나서 코스트코에 가서 이걸 사니 저걸 사니 계획을 얘기했다. 예, 예 아부지가 고생하시겠네요. 귀를 후비작거리며 듣는 둥 마는 둥 하는데, "그럼, 일요일에 와"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려던 엄마가 물었다. "아참, 근데 유라 너 별일 없지?"

어이쿠 참 일찍도 물어보십니다, 어머니. 콧방귀를 뀌면서 입을 뗐다.

"어, 뭐 별 일은 없고 무좀이..." 그리고 이쯤에서 난데없이 눈물이 터졌다.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한 나는 휴지를 찾으며 허둥대고 있는데, 나만큼이나 엄마도 몹시 당황한 듯했다. "얘! 요즘은 무좀약 잘 나와서 약한 거는 한번 싹 바르고 일주일이면 나아! 얘는 뭘 무좀 한 번 걸린 걸 가지고 울고 그래? 별 것도 아닌 일로 울지 좀 마라, 엄마는 우는 것 딱 질색이야!" 하고 우다다다 쏘아댔다.

나라고 울고 싶어서 울겠냐고요, 나는 급하게 휴지로 눈물을 찍어 눌렀다. "아, 그래? 당분간 좀 귀찮겠네. 요즘 일이 바빠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나 봐. 아무튼 푹 자고 일요일에 갈께요, 그날 봐"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하며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꺼진 핸드폰과 조금 전에 뜯어둔 살거죽을 번갈아 멍하니 바라보는데, 아이구 나참. 이까짓 무좀이 뭐라고 나를 울리냐, 울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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