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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ty noodle Jan 09. 2023

크리스마스 이브 이브 이브!

그때도 겨울이었지,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이었어. 그래, 써늘한 공기와 일찍부터 컴컴했던 하늘이 기억나.  


그날은 말하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날이었어. 감정에 익사해서 죽느니 시원하게 말하고 쪽팔려서 죽는 게 낫겠다 싶었지. 있는 힘껏 용기를 내서 문자를 보냈어. “저녁 8시에 너네 동네 놀이터에서 볼 수 있을까?” 


그 간단한 문자를 보내는 일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려서, 침을 삼키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았어.  


잠시 후에 “무슨 일인데?” 너에게 답장이 왔지. 나는 한참 지웠다 썼다를 반복한 끝에 “만나면 알게 될 거야”라고 입력한 문자를 전송하고는 그대로 핸드폰을 침대 위로 집어던졌어. 


으아아아, 거절하면 어떡하지! 불안해하면서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데 알림음이 울리더라. 침대 옆으로 재빠르게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폴더를 열었어. 


“그래, 알겠어. 이따 봐 :) ”  


기대한 답장이었는데 오히려 마음은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어. 어쩐지 괴롭고 또 혼란스러워지더라. 


만나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또 어떻게 말해야 하지? 강렬한 인상을 줄 만큼 화려한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아님 내 감정을 투명하게 다 보여주는 순수한 말을 해야 할까. 이 말도 꺼내놓고 저 말도 꺼내서 늘어놓다 보니 머릿속이 비좁아서 터질 것 같았어.   


대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머리통을 쥐어 싸매고 시계를 흘낏 보는데,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더라. 


아무리 평소에 지각쟁이인 나라도 이런 날에는 늦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게다가 너는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더더욱 안될 일이지. 


슬슬 나가야겠다, 혼잣말을 하면서 거울을 바라봤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 끝은 무척 차가웠고 외투를 꺼내 입는 손이 사정없이 벌벌 떨렸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여전히 머릿속은 잔뜩 어지럽혀진 채였지만, 넉넉하게 시간을 맞춰 버스정류장으로 나갔지. 


바짝 긴장해서 연신 욕지거리를 입에 매달고 있었어. 딱히 그럴 의도도 아니었지만, 그건 긴장을 덜어주는 주문조차 되지 않더라. 차라리 온갖 신을 외치며 잘되게 해달라고 빌 것을 그랬나.  


아무튼 버스를 타고 너희 동네 앞에 도착해서는 빵집에 들렀어. 생크림 케이크를 하나 사서 들고 나와 놀이터로 걸어갔지.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무릎 밑으로는 다리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어. 근처까지 다 와놓고 이제 와서 도망가고 싶더라. 


진짜 오늘 얘기해도 되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건 아닌가? 근데 오늘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그때 멀리서 걸어오는 네가 보였어. 너는 내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를 보고는 피식 웃는 것 같더라. 가까이 다가온 뒤엔 “뭘 이런 걸 사 왔어, 무슨 일이야?” 하고 활짝 웃으며 물었고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 이브 이브 선물이야.”말하며 건넸어. 


너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한번 더 배시시 웃었고 그 얼굴에 어쩐지 내 얼굴이 따끈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길래 생각했지. 아, 씨바 오늘 말하는 거 맞네. 그런데 뭐라고 얘기해야 하냐고.

갑자기 머릿속에 지진이 난 것 같았어. 윗니와 아랫니가 살짝 딱딱 부딪히기까지 했는데, 그건 단순히 추워서 그랬던 거야. 절대로 쫄아서 그랬던 거 아니야.

 

내 머릿속 사정이 어찌 됐든 너는 슬쩍 웃으면서 물었어. 그래서 진짜 무슨 일이야? 그 표정을 본 순간, 난 생각했어. 어쩌면 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온 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어렴풋이 알고도 이렇게 예쁜 표정으로 웃다니, 이건 그린라이트구나! 


머릿속의 나는 갑자기 양손으로 사발을 들고 벌컥벌컥 김칫국을 마시기 시작했어. 그러면 안돼, 인마!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야! 다급하게 마음을 진정시켰어.  


그리고 흠, 흠, 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떨리는 입으로 말했지. "우리 일단 어디에 좀 앉을까?" 저쪽 가장자리에 벤치도 떡하니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앉았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얘기는 꼭 놀이터 그네 같은 곳에 나란히 앉아서 하는 것 같더라고. 


나는 그네 안장에 어설프게 엉덩이를 걸치고 두 발을 땅에 붙인 채 무릎만 앞뒤로 살짝 흔들거렸는데, 너는 그네봉 아래에 케이크를 내려놓고 편안하게 안장에 앉아 양손으로 그네 줄을 쥐더니 신발 앞코만 살짝 땅에 대고 살랑살랑 그네를 탔지. 


그 모습을 흘낏 바라봤을 뿐인데 목구멍은 깔깔해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어.  


이럴 줄 알았으면 편의점에 들러서 물이라도 한 병 사 올걸 그랬나, 생각하는데 “그래서, 뭔데?” 넌 또 물었어. 얘는 평소답지 않게 왜 이리 재촉을 해, 남의 속은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하지만 이내 '아니지, 기껏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생각하며 음음, 다시 한번 목청을 고르고 그네를 흔들던 무릎을 멈추고 너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어. 


“네가 이미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 너를 너무 좋아해.”


아휴 이 미친놈, 이렇게 급발진을 하면 어떡한담. 밑도 끝도 없이 해버린 고백에 스스로도 놀라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데, 그 말을 들은 너 역시 약간 당황스럽다는 듯이 웃었어. “어?”  


하지만 어? 라니. 그 반응 뭔데? 나는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인데. “어… 이미 눈치채고 있는 거 아니었어?” 바보 같은 질문을 했고, 너는 내가 이런 말을 하려고 불렀다는 걸 전혀 몰랐다고 말했어. 


대체 너는 추운 겨울 저녁에 느닷없이 나오라고 하더니 다짜고짜 케이크를 건네준 사람이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진로 고민? 학교 선생님 욕? 가족 불화에 대한 하소연?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붙들고 말했어. 


“그랬구나, 그럼 네가 지금 너무 당황스럽겠다. 나 당장 너한테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대답은 나중에 해줘도 돼.” 


그리고 서둘러 수습하면서 그네에서 몸을 일으키고 덧붙였지. “아이고, 너 춥겠다. 이만 가자.” 그 말에 너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는 일조차 미안해하는 것처럼 머쓱한 표정을 지었어.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까?”하고 어색하게 묻는 너에게 “아니야, 먼저 가.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대답하곤 “케이크는 집에서 가족들이랑 먹어.”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어. 


잠시나마 그 케이크로 함께 촛불을 불고 서로의 얼굴에 크림을 묻히며 꺄르르 웃고 장난칠 생각을 할 때, 쪼끔 행복했어...


억지 미소를 유지하면서 삐걱삐걱 어설프게 손을 흔들고, 뒤돌아 걸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어. 


의자에 무너지듯 앉자마자, 눈을 꼭 감고 손을 마주 잡으며 중얼중얼 필사적으로 혼잣말을 했지 뭐야.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제가 과연 올해 크리스마스엔 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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