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기엔 나이가 많다는 말

나이 먹는 다이버들

by 발걸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건 왜요?”


“그래야 서열을…”


“서열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냥 이름 부르면 안 돼요?”


다이빙 훈련장에 다니기 시작한 지 두어 달 남짓, 내 나이를 물어본 사람은 가만 헤아려 보니 적어도 네다섯 명쯤 된다. 특별한 질문은 아니다. 다만 마흔을 훌쩍 넘긴 뒤부터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종종 멈칫하게 된다. 숫자는 늘 마음보다 저만치 먼저 달려가 있기에. 젊음이 이미 내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상대의 나이를 알아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이 있다. 위인지 아래인지가 정해져야 관계가 매끄럽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호칭을 정하기 위해서, 실례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뒤따르지만, 나이를 묻고 답하는 장면은 어색한 상황을 초래할 때도 많다. 실제보다 많게 짐작하든, 정확히 맞히든, 누군가는 반드시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 누구도 나이만큼 보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나이는 어느새 산 시간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어버린 것이 된다.


“와, 동안이시네요.”
“진짜요? 저는 서른 중반인 줄 알았어요.”

혹은,

“아, 나보다 어린 줄...”
말 끝을 흐리는 방식으로, 상대는 스스로의 실례를 수습한다.


그 무게는 대체로 여자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여자가 가장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나이는 빠르게 지나가고, 남자의 매력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소진된다. 나이가 든 남자는 경험과 성숙함이라는 말로 덧칠되지만, 나이 먹은 여자는 설명을 요구받는다. 이 차이를 떠올리다 보면 생각은 점점 길어진다.


언제부터 숫자의 무게를 의식하게 되었을까. 40대부터? 마흔아홉의 마지막 달이었을지도 모른다. 마흔이 끝나고, 쉰이 다가오고, 쉰한 살이 시작된다는 말을 나는 몇 해에 걸쳐 스스로에게 반복하며 의미를 부여했다. 그 말을 이정표 삼아 뭘 얘기하고 싶었을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지낸 친구와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목격해 왔다는 사실, 그 모든 변화를 통과해 깊어진 우정을 축하했다. 내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보내는 축하. 그리고 50대, 늙지도 젊지도 않은 이 시기를 어떻게 통과해야할 지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를 덧붙여도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육십이라는 숫자가 성큼 다가올 것만 같아서일까. 나이가 들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노화는 저주이자 상실이고, 늙은 사람은 욕망을 지닐 자격이 없나?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젊음을 붙잡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나이듦을 행복하게 여길 수 있을까.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수전 손택은 '행복의 은유는 젊음'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은유이며, 젊음은 기동성과 욕구, 갈망하는 상태의 은유'라고. 그 말을 곱씹다 보니 문득 토마스 만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과장된 화장을 한 채 해변에 앉아, 그리스 신처럼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를 바라보는 주인공 아셴바흐. 젊음과 늙음, 미와 추, 생명과 소멸이 한 화면 안에서 동시에 무너지는 순간.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았던 토마스 만에게 이 소설은 정체성의 암시이자, 나이듦과 갈망에 대한 고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셴바흐가 갈망한 것은 소년 타치오로 상징되는, 움직이고 소모되지 않으며 아직 열려 있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그는 젊음을 멀리서 바라본다. 그 거리가 무너지는 순간, 아름다움은 우스꽝스러움으로, 갈망은 파국으로 바뀐다.






한편 나이를 묻는 질문 앞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지나가는 숫자의 압력은 내가 사는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늘 반짝이는 새것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무엇이 있었는지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논과 밭, 오솔길과 언덕, 뽕나무가 있던 파주 신도시 교하의 어느 자락은 불도저로 밀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지금은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선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곳을 걸었던 기억마저 점점 흐릿해진다.


우리는 이렇게 과거에서 미래를 상상하기보다, 과거를 제거하고 전혀 다른 맥락을 들여오는 방식의 삶에 익숙해져 왔다. 축적과 연속 대신 단절과 교체를 선택해 온 것이다. 쉽게 얻고 쉽게 폐기하는 세상. 사람의 나이듦 역시 어느덧 이와 같은 기준 아래 놓이게 되었다. 자연이 내 몸에서 조용히 작동하는 변화의 과정은 시간의 전개로 이해되기보다, 성능 저하나 가치 하락이 된다.


여자들은 거울 앞에서 눈 밑 주름을 확인하고, 처진 볼을 당겨줄 병원을 검색한다. 코에 자가 지방을 이식하니 이마도 손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을 더 살아볼 것인가보다, 무엇을 되돌릴 수 있는지가 우선이다. 젊음을 되돌리는 데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관리하지 않는 사람, 자기 몸에 무책임한 사람, 혹은 실패한 사람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의 동물로서 끊임없이 펼쳐지고 변형되며 전개되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한다. 살아 있는 몸을 ‘업데이트가 끝난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나이듦은 경험이 아니라 잔존물이 된다. 그저 살아가며 변화하는 존재로 남는 일은, 비둘기나 물고기처럼,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그런데 다이빙 지상 훈련장에서, 이 모든 생각을 비켜 가는 사람들을 봤다. 머리가 희끗한 수수한 노년의 여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로 어쩐지 눈길이 갔다.


S는 처음 만난 날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재수강 등록 기간에 깜빡하면 이제 다이빙 못 해. 신규는 안 받아 주거든.”
“왜요?”
“위험하다나. 근데 난 이미 오래 했잖아. 예외는 있어야지.”


그는 말을 이었다.


“쉰둘에 잠실에서 시작했어. 그게 1998년, 아니지, 2008년이었으니까. 여기서 거의 제일 오래됐어.”


잠깐 주저하는 듯하다 덧붙였다.


“그런데 일요반에서 나를 초보들이랑 묶어 놓더라. 늙었다고.”

"3m 스프링에서는 이제 무서워서 못 서."


S가 스프링보드 위에서 파워 허들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나도 옆에 섰다.


“언니, 같이 해요. 하나, 둘, 셋, 네엣.”

우리는 박자를 맞춰 걷고 팔을 위로 뻗어 뛴 다음 착지했다.


옆에서 W가 말했다.


“OO아, S 언니 동작 봐. 몸을 안 쓰잖아. 너는 가슴을 너무 젖히고 있어. 가슴은 두고 팔만 들어.”


파워 허들 연습이 끝난 후 S는 스프링보드로 향해 보드 끝에 매트를 등지고 섰다. 발 뒤꿈치를 내렸다 올리며 보드를 살살 누르는가 하더니 점프. 몸이 떠오르고, 다리를 앞으로 곧게 뻗으며 앉은 자세로 매트에 우아하게 착지.


매트에서 S를 보던 누군가가 말했다.
“와, 우리 엄마랑 연세가 같으신데!”


반면 J는 또 달랐다.

“나는 예순에 시작했어. 누가 자꾸 권해서.”

J는 잠시 웃다가 말했다.
“에이, 살 만큼 살았는데 죽으면 어때. 그러니 한 번 해보자, 그런 마음이었지. 이제 한 10년 됐네.”


J는 늘 A형 점프만 반복한다. 회전은 위험하다고 했다. 중간에 아파서 1년을 쉬기도 했다. 훈련의 목표는 실력 향상이 아니라 지속이다.


H가 S를 향해 외쳤다.


"누나 백C 해봐요."

"뭐라고? 섹시?"


하하하 웃음이 퍼진다.


"빽 C 하라고!"


내가 소리쳤다.


"언니, 빽 C 섹시하게 해봐요!"


흔들흔들흔들 팔 올리고 날아서 등으로 착지.


S의 몸짓을 보며 생각한다.

다이빙 훈련장의 이 여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젊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젊게’라는 말은 언제나 젊음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들은 그 기준에서 이탈한 몸이다. 야심과 성취의 서사 바깥에서, 오고, 서고, 다시 올라서는 과정을 삶으로 수행하는 몸들.


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실이라기보다 전개의 다른 국면일 테다. 힘과 속도가 줄어드는 자리에, 다른 감각이 자리한다. 호흡을 인식하고,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며, 이전에는 통과해버렸을 장면들 앞에서 멈출 수 있는 알아차림의 능력. 매순간 과거로 미끄러지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는 태도.


그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부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효율과 성과, 젊음과 끊임없는 갱신을 요구하는 현 상태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이다. 나이 든 몸이 여전히 감각하고, 배우고, 실패하며, 다시 시도하는 데서 발생하는 즐거움은 이 사회가 몸에 배당해온 수명과 쓸모의 한계를 거부하는 적극적인 행위다.


그렇기에 즐거움은 기존의 여성 서사와는 다른 방향을 향한다. 돌봄과 희생으로 자기 몸을 소진하는 인고의 여자상도 아니고, 젊음을 관리하며 성취를 증명해야만 존속 가능한 성공한 여자상도 아니다. 수면 아래에서는 필사적으로 갈퀴를 저으면서 물 위로는 우아함을 연기하는 백조 같은 여성상과도 거리가 멀다. 여기에는 생산성도, 미담도, 자기계발도 요청되지 않는다.


성취 서사의 바깥에 어쩌면 우린 다른 종류의 여성 신화를 꿈꿔도 되지 않을까? 이름 붙여지지 않았고, 기록되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신화. 우리 주변의, 이름 없는 언니들, 할머니들 신화 말이다.


나이 든 언니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걸 오래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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