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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주 Nov 02. 2017

부록Ⅰ경계를 의심한 불온한 당신 ①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이정애

주류 대중문화가 공부하고, 대학가고, 취직하고, 이성과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을 알려주지 않던 시절, 순정만화 작가들은 그 밖의 수많은 삶들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주었습니다. 그중 이정애는 LGBTQ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 퀴어물을 아무렇지 않게 선보인, 우리에게 너무 일찍 도착한 작가였습니다. 


데뷔작| 1986년 <페인팅 버드>

대표작| 《열왕대전기》(미완), 《루이스씨에게 봄이 왔는가?》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미완), 《Bath & Shower》 《헤르티아의 일곱 기둥》



LGBTQ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 퀴어물을 아무렇지 않게 선보인, 우리에게 너무 일찍 도착한 작가. 날카로운 선과 그로테스크한 그림체, 현학적인 대사와 세계관의 작가이자, 1997년 7월 시행된 ‘청소년보호법’의 직격탄을 맞은 작가이기도하다. 그럼에도 만화에 대한 애정 혹은 책임감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했으나 검열, 잡지폐간, 지면에서 웹으로 플랫폼의 변화 등 외부 압력에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결국 절필을 선언했다. 


 이정애는 당시만 해도 당연시되던 이성애 밖의 세계에 근간을 두고,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스토리와 유머를 전개했다.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대학 재학 중이던 1982년 황미나 문하로 들어갔다. 만화와 작품에 관해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게 인연이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만화동인 ‘나인’ 결성, 동인지 『아홉 번째 신화』 창간 등 만화사의 굵직한 순간들을 함께 하게 된다. 


데뷔작은 1986년 『보물섬』에 발표한 <페인팅 버드>. 같은 해 대본소용 장편으로 《헤르티아의 일곱 기둥》을 냈다. 그리고 1990년 2월 『르네상스』에 《루이스씨에게 봄이 왔는가?》 연재를 시작한다. 작가에게나 만화사적으로나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이정애 개인에게는 첫 연재작이었고, 만화사적으로는 상업 잡지를 통해 공식 유통된 최초의 BL물이었다. 

영국을 배경으로 남성들의 ‘관계’에 밀착한 《루이스씨에게 봄이 왔는가?》는, 당시만 해도 당연시되던 이성애 밖의 세계에 근간을 두었다. 선과 악, 여성과 남성 등 현실의 이분법이 폐기된 시공간 위에, 이국적인 서구 문화, 신화부터 철학까지 아우르는 지적이고 세련된 캐릭터, 그들이 주고받는 사변적인 대화, 남녀 간의 사랑 ‘외의’ 사랑, 세기말적 세계관, 은근한 유머 등을 펼쳐놓는데, 이러한 경향은 ‘최후의 대작’ 《열왕대전기》까지 지속된 것이었다. 


이정애란 이름은 이제 사라집니다


이정애의 예사롭지 않은 작품들은 공부, 이성애, 결혼, 임신, 출산 말고는 대안이 없던 여성/독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안했다. 그것이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이유이자, 검열에 시달린 이유였다. 박정희 정권부터 시작된 만화의 ‘사전’검열은 전두환 신군부를 지나며 ‘사후’검열로 바뀌었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을 규제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작품이 나오면 검열을 내재화된 출판사가 제일 먼저 동성 간 키스신 같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장면을 수정액으로 덧칠하거나 빼버렸다. 그렇게 누더기가 된 연재분을 모아 단행본을 낼라 치면 검열기관이 같은 일을 반복했다. 외부 압박으로 연재가 중단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1997년 청소년보호법이 발효되면서 사정은 더 나빠졌다. 


그 와중에 만화계에 일대 풍파가 일었다. 잡지가 죽고 시장이 재편되고 플랫폼이 바뀌었다. 2000년 다른 많은 작가들처럼 이정애도 ‘코믹스투데이’와 계약을 맺고 《사일런트 리밋》 연재에 들어갔다. 헌데 서비스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코믹스투데이’가 자금난을 호소하며 작가들에게 고료를 주지 않더니, 급기야 ‘고료 지급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작가들은 파업으로 맞섰는데, 이정애는 갈등이 한창이던 2001년 12월 26일, 자신의 생일에 홈페이지를 통해 절필을 선언했다. 


“제게 있어 만화는 일이라기보다는 거의 놀이에 가까웠지요. (…) 만화사태니, 청보법이니, 줄줄이 폐간되는 잡지니, 하던 작품들의 거의 타의에 의한 중단, 작금의 코투 사태에 이르기까지 정말 무엇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저는 더 이상 놀고 있지 않더군요. (…) 이정애라는 이름은 이제 사라집니다.”


다만 프로로서는 활동을 접더라도 아마추어 BL소설 무대에서 이정애란 걸 눈치 못 챌 만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암약하겠다고 밝혔다. 이 결심은 얼마간 유효했으나, 2010년 표절 시비로 인해 '쏘니'라는 필명이 부득불 알려졌다. 이정애, 쏘니는 로맨스소설 작가 문정의 《현기증》이 자신의 소설 《Nothing More》와 《The Dead of Winter》의 주요 인물 설정과 전개, '인간의 죄와 구원'이라는 주제, 심지어 '김천댁 아줌마' 같은 조연 캐릭터의 이름까지 그대로 베꼈다면서 소송에 들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BL이 워낙 천대받는 하위 장르인 탓에 승소를 장담할 수는 없었으나, '음지'에서 생산, 소비, 유통되는 장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속수무책 당할 수만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선례'를 남기겠다는 결심으로 대법원까지 가는 지난한 법정 공방을 벌인 끝에, 2015년 이정애는 최종 승소했다. 




부록Ⅰ경계를 의심한 불온한 당신 ②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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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 만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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