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의 상실과 회복, 그리고

도연명의 귀거래사, 김신우의 귀거래사

by 박거행

자존감의 상실과 회복, 그리고

“군대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군대 시절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은 자존감의 상실에서 회복으로 나아가는 인생의 축소판 같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1986년에 입대했다. 입대한 순간, 나는 이등병이 되었다.

그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경험을 쌓았든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든 건 초기화되고, ‘이등병’이라는 틀에 맞춰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여야 했다.

존재감을 잃는다는 건 그런 거였다.

말 한마디에도 눈치를 보고, 실수 하나에도 가슴이 철렁하던 나날들.

자존감은 바닥을 기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일병이 되고,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었다.

나는 조금씩 익숙해졌고,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고, 신참들을 챙기는 위치에 섰다.

서툰 신병이 나를 보고 허둥댈 때, ‘내가 이만큼은 되었구나’ 싶은 자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존감은 다시 살아났다. 물론 진짜 완성된 자존감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나 자신을 긍정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전역 후, 사회 초년생으로 돌아오며 나는 다시 이등병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불릴 일 없는 이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나의 이력,

신입 사원의 어색한 인사와 말투 속에서 나는 또다시 작아졌다.

군대에서 병장이었던 나는 작지만 ‘고참’이었고,

사회에서는 다시 ‘신병’이 된 셈이었다.

그러니 자존감이란 게 한 번 회복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깨지고, 다시 쌓아야 하는 것.

어쩌면 자존감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재건축되는 구조물 같은 건지도 모른다.

군 복무 시절, 한 선임자가 28사단 마크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 준 적이 있다.

“이 원은 우주를 상징하고, 그 안의 문양은 땅 위에서 조국을 지키는 28사단을 나타낸다.

흰색, 초록, 파랑, 빨강, 검정, 연대별 색깔에도 태권도의 철학이 담겨 있다.”

그 설명을 들으며 ‘의미 없이 존재하는 건 없구나’라고 느꼈다.

모양 하나, 색 하나에도 철학이 있다면, 나라는 사람에게도 그런 의미가 있을 거라고.

훗날, 그런 생각과 닿아 있는 노래를 만났다.

1999년, 김신우가 발표한 ‘귀거래사’라는 곡이다.

“하늘 아래 땅이 있고, 그 위에 내가 있으니, 어디인들 이내 몸 갈 곳이야 없으리.”

도연명의 시를 노래로 만든 이 곡은,

그 당시에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듣던 노래였지만,

지금 다시 들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걸음에서, 지금의 나를 본다.

내가 어디에 있든, 작고 흔들리더라도,

내 존재 자체에는 이유와 자리가 있다는 확신.


시간이 흘렀다.

이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시기에 서 있다.

또다시 처음처럼 작아지고, 낯선 일 앞에서 망설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보다 한 가지는 분명히 안다.

지금의 이 작음도 지나갈 것이고, 자존감은 다시 차오를 것이라는 걸.

“하루해가 저문다고 울 터이냐, 그리도 내가 작더냐.”

자존감은 언제나 흔들린다.

하지만 흔들릴 수 있다는 건, 다시 바로잡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을 달리하면서 겪어 왔던 일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내게 주는 감흥이 있다.

군대에서, 사회 초년생 시절에,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자존감은 늘 그런 방식으로 가르쳐왔다.

다시 시작하고, 다시 세우는 것.

그게 살아간다는 것이고, 내가 나를 잃지 않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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