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헤르만 헤세
# 먼뎃불빛
: 먼 곳에서 비치거나 반짝이는 불빛.
어두운 삶의 길에서 먼뎃불빛이 되어 준 작가가 있습니다.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울리는 헤르만 헤세. 마음에 남는 책은 생의 계절마다 다르지만 인생 책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데미안』이 떠오릅니다. 누구나 삶의 부조리를 깨닫는 시절을 겪습니다. 선의 세계에서 안온하게 살아가던 싱클레어도 조금씩 악의 세상을 인지해 나가다 크로머를 만나게 돼요. 그는 또래에 뒤지고 싶지 않았던 싱클레어의 치기 어린 거짓말을 이내 알아채며 그것을 빌미로 싱클레어를 먹잇감으로 삼습니다.
부모에게조차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싱클레어는 벼랑 끝에서 만난 데미안 덕분에 크로머의 덫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지요. 하지만 절망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벗어나게 됐다는 부끄러움과 데미안에 대한 경외감 때문인지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멀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삶에 중요한 시기마다 연이 닿게 되고, 결국 싱클레어는 데미안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던 열일곱의 나는 친구들의 아픔을 통해 처음으로 그늘진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어요. 나 역시 그로 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부모님께 털어놓을 수 없었고, 혼란스러운 터널을 헤매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는 어렵기만 했는데 글을 담아낼 마음 그릇이 적절한 순간을 만났던 거예요. 물론 그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었지만 헤세의 문장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던 내게 등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 후 처음으로 한 작가를 향한 탐독을 해 나갔어요. 구할 수 있는 그의 책을 모두 사서 한 권 한 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껴 읽었습니다. 그의 글 속에 담긴 의미를 명확히 알 수는 없어도, 나만의 오독 속에서 헤세의 문장은 삶을 뜨겁게 만들었지요. 책을 통한 소통으로 친해지게 된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데미안』의 발췌글 하나를 노트에 써서 선물해 주기도 했어요. 친구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의 문장 수집 노트가 되어 지금까지 소중히 보관되어 있습니다. 호주로 떠나 제 몫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친구를 만난 지 어느덧 이십 년이 되었네요. 몇 년에 한 번 한국에 오면 만나곤 했는데 자연스레 시절 인연이 된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트만 보고도 알 수 있을까요. 첫 페이지에 있는 자신의 필체를 보며 그 시절의 미소를 짓는다면 그간의 세월은 일순간 압축되며 공간의 온도를 데워주겠지요. 처음 본 듯 바라보면 찬찬히 설명해 줄 거예요. 힘들었던 날 무턱대고 찾아갔던 나를 환대해 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도 함께 말이에요.
나의 청춘이 헤세의 숲을 헤매었던 것은 그의 문장에서 아픔을 겪은 사람의 결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방황을 자신만의 깊이로 해쳐간 헤세의 글은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 시렸지만, 그렇게 또 내 영혼을 스스로 치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글은 고된 삶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며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젊은 시절 나를 관통한 책을 재독 하는 것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것만큼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입니다.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었을 때 기억과는 반대로 재해석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헤세만큼은 그저 좋은 빛깔로 남겨두고 싶었기에 미루어 두었다가 끝내 다시 그의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바로『삶을 견디는 기쁨』 덕분에 말이지요.
"내 삶이 그런 진통을 겪을 때마다 결국 나는 무언가를 얻었다."
"고통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들어 준다."
우리는 자신만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형벌 같은 고통 속에 괴로워하며 오롯이 혼자 버텨야 하기에 삶이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처럼 여겨질 때도 있어요. 여전히 어려운 생이 녹록지 않기에 헤세와 같이 치열한 자아실현의 길을 걷는 사람을 동경하는지도 모릅니다. 채울수록 허망한 물질에 얽매이지 않으며 깨어 있는 정신으로 덜어내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이 들수록 반짝이는 눈을 가진 헤세의 길 위에서 먼뎃불빛 바라봅니다.
반짝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삶이는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