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책방 헤아림
#갈빛
: 검은색을 띤 주황 빛깔 (갈색)
문장 사이로 부는 바람이 마음을 훑고 지나가면 삶이 일렁입니다. 인연처럼 마주하게 되는 눈부신 문장은 마음의 스위치를 켜주지요. 젖은 솜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날에는 책을 찾아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합니다. 문장의 향기를 헤아립니다. 그러다 보면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간신히 심폐 소생술을 받게 되지요.
글숲 거닐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책이 있는 곳은 안식처예요.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등만 보아도 숨이 쉬어집니다. 서가 사이를 탐험하며 온종일 앉아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 도서관을 좋아합니다. 빛깔이 다른 책방을 찾아가는 것은 여행 같은 설렘을 줍니다.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다정하게 안아주는 책과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괜찮은 삶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요.
마흔의 중턱을 오르며 ‘읽고 쓰는 삶’을 향한 꿈을 다시 그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쓰는 글이 책으로 엮어질 가치가 있는지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껏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면 남은 생은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어요. 내게 있어 글쓰기는 책의 든든한 벗이기도 합니다.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며 따뜻함을 나누고 싶은 존재의 이유입니다.
묵묵히 읽고 쓰다 보면 어느새 '호호'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요. 그때는 세상의 시계와 달리 느리게 흘러가는 책방에서 동그란 미소로 손님을 맞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을 힘들어하는 이가 책방을 운영할 수 있을까요. 낯가림 많은 책방 주인이 장사 수완까지 없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지지만, '하하' 할아버지가 된 씩씩한 남편이 곁에 있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은은한 조명이 멋스러움을 주는 갈빛 서가. LP 음악과 어우러진 커피 향 가득한 책방. 그곳에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바랄 것 없는 노년이 되겠지요.
책방에 가면 왠지 말을 걸어올까 봐 조마조마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환한 인사만 건넨 후 적정한 거리 두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다 손님이 먼저 무언가 묻기 시작하면 비로소 편안한 시간을 나눌 거예요. 맞이하는 인사는 강아지처럼, 그리고는 이내 고양이가 되었다가 손님이 말을 건네면 수줍은 책벗이 될 거예요.
책방 이름도 여러 가지 생각해 두었습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책방 헤아림'이에요. 나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인생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니까요. 어려운 살아감 속에서 때로는 하나의 문장이 삶에 빛이 됩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이 인생의 어느 계절에는 별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 책을 만나도록 도울 수 있기를, 그런 일이 일 년에 한 번만이라도 책방 헤아림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해요.
또 다른 상상도 해봅니다. 어느 날 문득 연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딸들을 보면 어깨 한 번 툭 쳐 주며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쉬어가게 해주고 싶어요. 마음으로는 꼭 안아주고 싶겠지만 바라지 않을 수도 있으니 꾹 참으며 말이에요. 혹시 곁에 어린 손주를 데리고 왔다면 그 아이들을 대신 안아줄 거예요. 지금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미래의 일은 모르잖아요.
묻고 싶은 말이 많아도 나이 들수록 줄이려고 했으니 잘 참아낼 것이고, 늘 배우는 삶을 살아가는 엄마 아빠의 웃음만 가득 담아가게 하고 싶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지는, 나의 꿈을 그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