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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나비의 책공간 Mar 05. 2019

영화가 끝난 후에

일기&일상

좋은 영화를 엔딩 크레디트까지 다 봤다. 주변을 둘러보니 영화관 조명은 다 켜져 있고 직원과 다른 관객은 다 빠져나갔다. 영화가 끝났다는 아쉬움과 좋은 영화를 봤다는  보람과 함께 영화관에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그 좋고 아쉬웠던 감정은 나도 모르게 허무와 공허로 바뀌었다. 그저 영화에 불과한데 너무 많은 감정을 쓴 것 아닐까 영화를 감정 이입해서 본 것 아닐까 싶었다.


고순도의 행복을 체감할수록 그 행복이 사라졌을 때 나는 내 안에 허무함과 공허감으로 가득 찬다. 내 안에 있는 감정 통이 텅텅 비어서 나는 연료가 다 떨어진 기계가 된다. 그 기계는 감정 탱크가 다시 찰 때까지 잠시 정비 상태에 빠져야 한다.


나는 감정 탱크 통이 좀 작은 편이다. 사소하게 길가다 주운 1,000원이나 교대 알바가 15분 일찍 올 때 행운이 내 주위에 있는 느낌이다. 다만 반대 상황인 교수님이 3시간 풀 연강 때리거나 앞 타임 알바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건조기와 탈수기를 안 돌리고 갔을 때 나는 좀 화난다.


감정 탱크 통이 작다 보니 감정을 절제해서 느끼는 방법을 먼저 배웠다. 통을 늘리는 건 어떻게 늘려야 할지도 모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본능적으로 배웠다. 좋은 일이 있어도 조용히 미소만 짓고 웃긴 코미디를 봐도 입을 막고 킥킥거린다. 화가 날 때는 복식 호읍을 하며 감정을 다스리고


아마 나는 냉소라는 제어장치를 감정 탱크에 장착했다. 온전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제어장치 말이다. 너와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됐다. 영화표를 누가 준다고 했을 때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했다. 감정 탱크용량을 초과할 수 있으니 그 탱크가 터지면 나는 마비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영화의 결말은 정해졌다. 너는 남자 친구가 있지만 내가 시간이 지나도 너를 보고 싶다는 걸 알고 나왔다. 그리고 처음 받는 고백이라 기뻤고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서 나왔다고 한다. 영화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고 내 감정 탱크는 터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심하게 떠는 나를 보고 네가 시킨 녹차라테 컵을 만지라고 했다. 따뜻한 게 긴장 풀어주는데 도움이 된다면서 천천히 말해도 된다고 나를 안정시켰다. 너는 따뜻하고 주변에 의미를 찾아주었다. 본인이 직관이 강하다며 내 페북을 보고 글 쓰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내향적이니 천천히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너의 과거 이야기와 내 과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너에게 현실적 이상주의자라고 놀렸다. 사실 부러움과 놀람을 숨기고 싶었을 뿐이다. 너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살았지만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아픈 상처 속에 살고 있었고 현실에 체념하듯이 살고 있었다. 나는 너처럼 이상을 꿈꾼 적이 있을까 그 이상을 만들어가는 과정 동안 잘 버텼구나


너는 내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구나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는 내가 너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너 잘못이 아니라고 누구 잘못도 아니라고 그냥 상황 때문에 그렇다고 나를 위로해줬다.


너는 나보다 4살이 어렸지만 누나 같았다. 이 사람이면 내가 의지해도 괜찮겠다고 나와 다른 성향과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너와 다투는 약간의 논쟁이 나는 즐거웠다 진심으로 아름다웠고 즐거웠다. 옆에 있을 수도 아마 다시 못 볼 것 같았다.


너에게 번호와 카톡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번호와 카톡을 받으면 질척거릴까 봐 내가 나쁘게 기억될까 봐 내가 더 힘들어질까 봐 아름답게 끝내고 싶었다. 너와 영화가 끝나고 도서관에 컴활 2급 실기 연습하러 갔다.


평소보다 문제가 잘 풀렸다. 계산문제도 1개도 틀리지 않고 차트 작업까지 마무리했다. 2회분을 풀렸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용히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렸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쥐 죽은 듯이 1시간 잤다. 자고 일어나니 슬프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배가 고파서 밥 먹으러 나왔다. 이런 순간에 배가 고프고 다리 종아리가 당기는 나 자신이 약간 미웠다.


영화가 끝나고 내 감정 장치는 터져버렸다. 감정 통이 조금 늘어난 것 같지만 내 안에 찬 공허와 허무를 언제 몰아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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