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과계 중환자실 수 선생님, 독서실 사장님 부부
독서실을 다니기로 결심한 계기는 나만의 공간 확보와, 매일 해야 하는 업무 공부를 위해서 이기도 했지만, 입사 교육 당시 MICU(내과계 중환자실) 수 선생님의 말씀이 결정적이었다. 단호한 카리스마로 아직은 티 없이 밝기만 한 예비 신입 간호사들을 제압하셨던 그분의 아우라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풍부한 임상경험으로 일타강사처럼 뇌리게 팍팍 꽂히도록 교육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마무리하셨다.
"저는 간호대학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언제나 면접에 늘 탈락의 고배를 맞아야 했습니다. 아마도 지금과 차이가 없는 체중 때문인 것으로 짐작되는데, 서울의 메이저 대학병원에서 모두 떨어지고 유일하게 저를 뽑아준 병원이 이곳이에요. 나를 처음으로 인정해준 곳,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느 직장과 마찬가지로 제가 지금 다니는 이곳이 언제나 마음에 들기만 했겠어요. 저도 항상 불만은 있습니다. 그래도 나를 받아준 이곳에서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 독서실을 다니면서 공부했고, 병원에서 풍부하게 제공하는 교육을 흡수하여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때를 아무리 미화시켜봐도, 나는 그 수선생님의 거룩한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서, 혼나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했고, 그러다 좋은 기회가 오면 떠나기 위해서 독서실을 다녔다. 심지어 피곤에 지쳐 못 가는 날도 있었고, 어느 날은 한 시간도 못 있다가 기숙사로 돌아온 적도 있었지만 꽤 정을 붙이고 열심히 다닐 수 있었던 데는 독서실 사장님 사모님 덕분이었다.
나는 경상남도 창원에서 나고 자라 대학생활까지 모두 보내고 대전의 모 대학병원에서 첫 출근을 시작했다.고향을 떠나는 게 철없던 시절의 로망이었던 나는 부러 멀리 떨어진 이곳을 지원했다. 곧 얼마 되지 않아서 뼈저리게 후회할 만큼 객지 생활과 직장생활은 동시에 나를 짓눌렀다. 경상도 억양이 배어있는 말투도 이곳에서는 한 번쯤 뒤돌아 볼만큼 튀었고, 퇴근 후에 음식을 배불리 먹어도 살은 쭉쭉 빠질 만큼 몸과 마음은 언제나 긴장 상태였다. 곤두서 있던 나를 녹여주었던 몇 가지 중의 하나는 독서실 주인 부부의 배려였다. 부산에서 살았다면서 나를 반겨주시면서 직장인이 공부하겠다며 독서실 다니는 것을 참 대견해해 주셨다.
독서실은 학생들을 위한 차량 운행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병원 기숙사까지 도보로 15분 정도로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으나 종종 심야시간에는 사장님께서 봉고차로 직접 태워다 주셨다. 하루는 혼자 타는 날이었는데 자정 무렵이 주는 감성 때문인지 사장님께 이렇게 물었다.
"사장님, 저는 제 고향 창원이 너무 그리워요. 사장님은 부산에 다시 가고 싶지 않으세요?"
"혼자 객지 생활했을 때는 지나가다가 부산과 관련된 사소한 것만 봐도 그립곤 했는데, 이곳에서 살면서 가족들이랑 정착하니까 그것도 무뎌지더라고."
넘칠 것 같은 눈물을 꾹 참고 " 네......"라고 겨우 대답했다.
속으로 과연 내가 저분처럼 처음 살아보는 이곳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날이 올까? 아니 그것보다도 신입 간호사인 내가 병원 업무에 능숙해질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라며 답답한 속마음을 안고 내일 출근을 준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