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린시절
"저는 얼마나 서울에 살고 싶었는지 몰라요."
어제 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의 가족이 놀러 왔다. 친구의 어머니는 경상도에서 태어났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방학이면 서울로 혼자 올라와 고시원을 잡고 2주씩은 있었다고 한다.
'서울이 뭐 대수라고. 서울도 서울 나름이지.'
나는 서울 토박이다. 진짜 토박이다. 꽤 오래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시에서 서울 토박이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기억으로 서울에서 가장 오래 산 집이 23대인가 그랬다. 그 조사에서 나의 아버지는 18대째 서울에서 사신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 집은 서울 4대문 안에서만 18대를 산 집이다. 아버지는 여기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아버지, 그런데 저희 집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내 질문에 아버지는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우리 집안은 서울에 99칸 집을 가지 대갓집이었다. 100칸 집은 왕만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 것은 보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라는 한 조상님께서 단발령도 따르지 않고, 일본 교육도 받지 않고 유랑 생활을 하셨다. 그 뒤로 집안이 주저앉았다. 아버지께 들은 얘기다. 그래서일까? 할아버지는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목수였고, 아버지 또한 정말 기초적인 교육만 받으셨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서울도 서울 나름이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 대도시에는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도, 제일 가난한 사람도 같이 있는 곳이다. 맛있는 것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면서, 또 가장 안 좋은 음식이 다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매일 높은 고층 건물에서 찬란한 야경을 보며 여유롭게 잠을 드는 사람들도 있고, 99개의 계단을 올라가야지만 닿을 수 있는 산동네 꼭대기에서 턱에 찬 숨으로 찬란한 야경을 보며 꿈을 꾸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집은 그 99 계단을 다 오르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난한 동네를 찍을 때 촬영 장소로 곧 잘 사용되곤 했는데, '옥탑 방 고양이'라는 드라마의 옥탑집 배경이었다. 서울 강북 한가운데 낙산 성터. 지금은 벽화마을로 잘 알려진 이화동. 내 어린 시절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세요."
이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궁금하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별로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 비탈길, 돌 산, 거친 옹벽, 혼자 울고 있는 아이, 마을버스, 좁은 골목길, 낙산 성터. 그리고 모든 장면이 흑백이다. 정말 떠오르는 장면이 몇 장 되지 않는다. 그래서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화동에 대한 내 기억을 글로 정리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이화동에서 살았던 기간은 초등학교 1~2학년 때로 그리 길지 않은데, 어린 시절 기억이 계속 그곳에 머무는 건, 그곳에서 겪은 가난의 장면들이 가장 강렬했기 때문이다.
"아빠, 나 설거지 하고 싶어. 가르쳐줘."
딸아이는 설거지나 요리를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가끔씩 하게 해 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나는 재미로라도 아이에게 설거지를 가르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설거지도 음식도 정말 일찍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가 6살 때부터 일을 나가셨다. 형들은 이미 초등학생이었고, 형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6살 아이는 혼자 집을 지켰다. 보온밥솥도 없던 시절, 어머니는 이불장 두꺼운 이불 사이에 찬합을 넣어놓고 가셨다. 점심시간이 되면 찬합에 들어있는 아직 따뜻한 밥을 혼자 꺼내어 몇몇 반찬과 함께 찾아먹고, 정리하고, 때로는 설거지도 하며 그렇게 자랐다. 하고 싶어서 한게 아니다. 해야 했다.
초등학교 1학년. 이화동으로 이사 간 지 얼마 되지 않는 때였나 보다. 4교시 수업이 끝날 즈음이 되면 나는 괜히 닭똥같은 눈물을 몰래 뚝뚝 흘리곤 했다. 담임 선생님이 알아차리시고 수업 후 나를 따로 부르셨다. 나는 혼자 있는 집이 무섭고 가기 싫었는데, 그 마음을 아신 선생님은 종종 하굣길에 같은 방향으로 가는 친구를 붙여주셨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우산을 가져올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비를 맞고 그냥 가는 아이들. 나는 망설임 없이 집으로 향하는 아이였다. 집에 가면 젖은 옷을 짜 빨래통에 넣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비 오는 어두운 날 집에 혼자 있는 것은 더 싫었다. TV가 나오는 5시 30분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는데, 그 시간에 난 또 뭘 했었는지 기억이 없다.
"며느리 학교 갈 때 내가 아이 봐 주마. 너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퇴근해라."
첫째 아이가 2살이 되고, 아내는 대학원에 복학했다.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면 부모님이 오셔서 아이를 봐주셨다. 내가 퇴근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기간 동안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줄 곧 말씀하시곤 했다.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두고 일하러 나간 게 너무 미안했다고. 그래서 너 아이 생기면 절대 그런 일 안 생기게 하겠다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어머님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오래 맡겨만 놓아도 그것 조차 미안한데, 6살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가는 어머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그나마도 다행이었던 건 그때에는 우리 집 같은 집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다들 어려웠고 힘들었다. 동네 사람들 처지가 다 고만고만했고, 또 그럭저럭 서로 도우며 살았다. 집에서 5분만 걸어가도 또 더 못 사는 집들도 있었으니 상대적 빈곤을 느낄 꺼리는 별로 없었다. 나에게는 형님이 두 분 계신데, 집이 한창 어려울 때 형들은 사춘기를 겪었다. 가난은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킨다. 형들은 다소 위축된 사춘기를 보내지 않았을까? 나는 가난으로 위축되기에는 어렸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내 성격도 한몫했을 거다.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 외로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늘 활발하고 당당했다. 사춘기에 접어들 때쯤, 집안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다.
지금의 나는 온전히 과거의 산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존재도 않다. 부정하려고 해도 그것이 사실이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지금 나의 성격, 나의 습관과 행동의 많은 부분은 과거가 남긴 부스러기들일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진 않는다. 솔직히 크게 불편하지도 않다. 나이 탓일까? 그냥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얼마든지 내가 원하면 바람직한 행동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지해야 한다. 내 행동에, 마음에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왜 왔는지 그 정체를 알아야 한다. 사람은 인지하는 것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인생성장 보고서에 따르면 어린 시절이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인생 후반기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인생의 후반기로 갈수록 더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보고서에서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지만, 나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와의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다. 문득 우울해지거나 흐린 날씨에 센티해질 때, 어린 시절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아니, 어린 시절이라기 보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다는 것과 남은 기억 마저도 흑백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냥 그렇게 그런 어린 시절의 나를 직면한다.
그래... 그 높은 산동네 어두운 방구석을 훌쩍이며 홀로 지키던 어린아이는 지금 참 잘 자랐다. 그동안 참 잘 해냈다. 내가 나를 칭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