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이 밀려오면 어떻게 하겠어? 그냥 흐름대로 가야지. 조류는 거스를 수 없는 거야. 하지만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고 또 밀물이 있는 거야. 그때 움직이면 돼. 산 넘고 산 있고 물 넘고 물 있다고 했듯이, 기회는 또 온다고, 그때 들었던 얘기가 정말로 힘이 됐었어."
전 회사 선배님을 만났다. 홍콩에서도 몇 번 뵈었었다. 선배님 상황도 사실 비슷했다. Regional position이 줄어들면서 자리가 없어졌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 가장 유력했던 본인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정해졌었단다. 그때 본인의 직장 선배가 해 준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 때가 있는 거야. 그걸 어떻게 하겠어. 하지만 절대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는 마. 네가 그동안 쌓아놓은 경력은 어디 안 간다. 나는 오히려 그때 걱정과 염려로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버린 시간이 너무 아까워. 지금 있는 시간 다시는 안 와. 열심히 운동하고 못 본 책도 보고. 그렇게 준비하고 있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선배님이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지는 몰랐다. 선배님은 지금 한국의 다른 회사에서 사업부장으로 안정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금의 삶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한다.
"인생이 참 알 수 없어. 그때 한국에서 내 자리될 줄 알았던 그 포지션은 또 일 년 뒤에 없어졌어. 그 사람도 나간 거지. 내가 거기 됐어도 결국 1년짜리였던 거야. 항공기 사건(무안 공항 제주항공 사건)을 봐도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냐. 인생 참 허무하다. 오늘 보내는 보통의 하루가 정말 감사한 거야. 하루하루가 감사해."
다 맞는 말이다. 한마디도 공감가지 않는 얘기가 없다. 거기에 덧붙여 서로가 살면서 보게 된 여러 사례들을 나눴다. 한 Global position에 한국과 대만 지사로부터 몇몇 사람들이 지원했다. 결국에는 홍콩에서 지원한 한 외부인이 선발되었다. 지원했다가 떨어진 분들에게는 안타까운 경험이었을 거다. 그런데 웬걸, 그 자리는 이번 구조조정과 함께 없어졌고, 오히려 선발되지 않았던 분들은 자리를 보존하게 됐다. 어떤 지인은 이직을 했는데 이직을 하자마자 팀 보직이 늘어나서 운 좋게 팀장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경쟁에 밀려 다른 회사로 갔는데 그 회사가 3년 만에 두배로 성장했다. 그걸 예측하고 간 건 아니다. 그런데 곧 팀원을 뽑는 팀장이 된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지금 일어나는 일들에 너무 성급하게 일희일비할 건 아니다.
"요즘 기분은 어때?"
"많이 괜찮아졌어요. 사실 힘들었죠, 특히 퇴사 통보받았을 때는. 그래도 시간 지나니까 받아들여지고, 운동 열심히 하고 사람들 만나고 그러고 있어요.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시시때때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또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지인 중에 진심으로 도와주시는 정말로 감사한 분들이 있다. 내가 다녔던 전회사에서 교육담당자를 더 뽑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식 공고가 나면 지원해 보라는, 정말로 나를 생각해 주는 권유였다. 최근 LinkedIn을 검색했을 때, 요즘 진짜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중에 정말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또 가면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까? 회사생활은 결국에는 끝이 있는 법이고, 요즘 트렌드를 보면 L&D자리는 정말 설 자리가 좁다. 나이도 적지 않아 취직을 한다고 해도 오래갈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아무 준비도 안되어 있으면서 뭘 따진담...... 아직 배가 덜 고픈가?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데, 아직 그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은가 보다.
지난 2일간 외부에서 진단도구 교육을 받았다. 다른 산업군의 많은 분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였다. 같은 조에 있던 한 강사님과 점심을 같이했다.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신다고 했다. 너무 궁금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회사에 있으면서 코칭 자격도 다 따고 나올 준비를 한 삼사 년은 했는데, 또 막상 나오고 나니까 3년 정도는 정말 고생했어요. 회사 다니면서 준비한다는 게 또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더 일찍 나와서 준비하는 것이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 말도 맞는 것 같다. 결국에는 홀로 서야 한다.
한 때는 물 만난 고기처럼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적이 있었다. '저 40대 중반 선배님들이 겪는 상황들을 나는 절대 겪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시냇물은 피하거나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조류는 거스를 수가 없다. 같이 흘러갈 뿐이다. 더 심하게 양극화되어가는 부의 분배, 정치적 상황, 그리고 AI와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촉발된 거대한 사회구조의 변화를 몸으로 겪는 중년의 가장. 정부로부터 충분히 노후 지원을 받지 못하는 부모세대를 봉양하고 다소 늦은 나이에 낳은 자녀세대를 오래도록 양육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끼인 세대. 이 흐름에 나도 단단히 끼어있는 그냥 평범한 중년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나를 침체로 몰고 가지는 않는다. 나의 지난날, 그 어떤 날이 과연 수월하고 평탄했던가? 쉬운 날은 없었다. 없는 기회 속에서 노력하고 또 헤쳐나가고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의 상황, 쉽지 않지만 뜻을 세우고 노력한다면 또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물고기는 물의 고마움을 모른다. 한 번 물 밖에 나온 물고기는 물의 고마움을 마음 깊이 깨닫는다.
지금의 쉼이 끝나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될 때에는 더 감사하며 진심을 담아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만남과 기회가 열리기를 기도하며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