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시편 25편' 인도와 보호를 위한 기도
해나와 나들이를 하다 보면 허리를 숙여 해나의 눈높이에 내 눈높이를 맞춰볼 때가 있다. 공연이나 전시를 볼 때 앞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에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울타리 너머의 풍경을 보고 싶어서 먼저 안아달라고도 한다.
존경하는 박영선 목사님께서 '성장'을 기막히게 설명해 주셨다. 키가 작을 때는 담장 너머 세상이 보이지 않지만 키가 자라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이것이 성장이라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아직 자라지 못했을 때는 보이지 않아 답답하던 것이 자라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고.
나이 들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 세상 이치를 통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는 화가 나던 것이 이제는 화나지 않고, 참지 못했던 것을 참게 되고, 나 잘난 줄 알았는데 내가 제일 못났음을 알게 되는 것. 그래서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 말이다.
다윗의 기도 속에서 그가 지나 온 세월을 통해 깎여지고 뭔가 숙연해진 다윗이 느껴진다. 자신의 위치와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선과 점점 맞춰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라디오 주파수가 정확한 지점으로 가까워지면서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가는 것 같다. 하나님 보시는 담장 너머 세상을 다윗도 바라보게 된 것 같다.
'6 여호와여, 옛날부터 보여 주신 주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소서. 7 내 어릴 때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한결같은 사랑과 선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소서.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므로 죄인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시고 ... 11 여호와여, 내 죄가 많을지라도 주의 이름을 위해 용서하소서.'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시도록 살아가려 애쓰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결과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려는 노력이 한 때는 큰 자랑이었다. 하지만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 만물들은 이미 하나님의 질서 안에 머무르면서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다. 전에는 자랑하고 싶던 모습이었지만 어쩌면 당연하고 기본적인 모습일지 모른다.
하나님께 용서와 평안과 은혜를 기대하는 근거는 내 모습과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더욱더 이해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나를 그저 눈감아 주시기를, 죄가 끊임없이 생각나는 나를 그저 용서해 주시기를, 그저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이유로 나를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고 바라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