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솔직하지 않은 내 모습을 보여줘도 될까?
아내를 속이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아내를 속여야겠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아내를 속여야 할 것 같다. 아내를 속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위장시켜야 한다. 철저하게 다른 내가 되어야만 한다.
나름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인데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은 없다. 하지만 달리 묘수가 없지 않은가. 아내를 속이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이 사실이 서글프지만 냉정해지자. 한 사람만 속이면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테니.
아내를 속여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평범한 하루에서 발생했다. 늘 그렇듯.
ㅣ 빨리 중고차로 팔아야겠네
" 우리 차 진단하는 거 언제로 예약할까? "
아내가 간단한 물음을 물어왔다.
나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는 내가 외부 자극에 저항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이다. 대뇌피질 사이사이에 때가 낀 듯 두뇌회전이 뻑뻑해지기 시작했다. 저것은 이성적 과정을 통해 발현된 질문이 아니다. 다분히 감정적 질문이다.
아내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저 질문을 통해 아내가 얻어내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또한 내가 저항하는 이유는 무얼까? 도전과 응전, 그 사이에서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최선인가.
거슬러 올라가 봐야 했다. 최근 우리 가족은 자그마한 세컨 카를 구입했다. 6일간의 구정 연휴를 눈 앞두고 나는 아내와 함께 새 차를 인수해 왔다. 엄밀히 말하면 그 차는 써드 카였다. 그동안 세컨 카로 탔던 차를 아직 처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써드 카인 세컨 카를 몰고 오는 동안 아내는 아파트 주차 비용을 걱정했다. 두 대까지는 만원만 추가하면 되지만, 세 대부터는 비용이 확 비싸진다 했다. 손님 주차용으로 월 200분이 할당되어 있지만 연휴가 지나면 끝이라며 빨리 중고차로 팔아넘겨야겠다고 했다.
여기서 잠깐. 아내는 주차 비용에 예민한 사람이다. 결혼 전 데이트 할 때도 음식점이나 카페에 가려면 주차가 되는지 먼저 확인하곤 했다. 아내에게는 주차 가능한 곳들 리스트도 입력되어 있었다. 주차가 불가능한 곳이면 주변에 저렴하게 주차할 수 있는 곳을 검색했다.
내가 별생각 없이 10분 당 천 오백 원 하는 곳에 주차하면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주차 비용이 가장 아깝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도로 위 불법주차나 개구리 주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가 옆에서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집안 돌아가는 일에 별생각이 없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관된 사람이다. 어제까지 별 생각 없이 살았으니 오늘도 별 생각 없다는 게 문제 될 리 없다.
내 역할은 단순히 동의하는 일이다. 지금 몰고 오는 차도 아내와 아이가 골랐다. 나는 토 달지 않고 좋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그 상황도 아내의 중얼거림에 그저 동의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 그러게, 빨리 중고차로 팔아야겠네. "
앵무새 되풀이 하듯 답했다.
앵무새가 되풀이 말을 했다면 정말 신기해했을 아내는 아무 반응 없이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반들반들한 스마트폰 액정 위에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도 밀어대다 보니 마찰이 발생했는지 '뒤적뒤적'하는 소리가 들렸다.
" '헤이, ㅇㅇ'에 신청하면 자동차 진단하러 오시나 봐. 그때 차 사진을 찍는대. 미리 차 청소를 해놓는 게 좋다고 하네. "
ㅣ 나 보고 차 청소 해놓으라는 거지?
그렇다. 아내는 공기 중에 진동을 일으켜 저런 사운드를 만들었었다. 방금 전 내가 들었던 아내의 물음은 필경 이 사운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아내도 나름 배운 사람이다. 지구인 대부분이 사용하고 있는 달력인 그레고리력은 혼자서도 충분히 해독할 수 있다. 본인이 직접 날짜를 선택해서 예약을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물어본 이유는 내가 원하는 날짜를 직접 정하고 그전까지 차 청소 해놓으라는 의미였으리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 스스로 차 청소를 하지 않으리라는 깊은 불신으로 비롯된 간접 압박이었으리라.
압박이 들어왔다. 내 취약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중고차로 처분해야 하는 것도 맞고 그전에 청소를 해놓아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런데 왜 아내는 내가 차 청소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내가 차 청소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차 청소까지 할 여력이 없다는 생각은 어째서 하지 못하나?
나는 아침부터 설거지 하고 해나를 씻기고 밥 차려서 해나 먹이고 숙제시키기까지 알차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막 의자에 앉았다. 소파에 누워서 이런 나를 보지 않았나. 그런 내게 군것질 거리 하나 밀어주기는커녕 또 다른 일거리를 모색한다고? 나를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 나지 않고서야 저럴 수는 없다.
" 지금 나 보고 차 청소 해놓으라는 거지? "
칼집에서 살짝 칼을 들었다 놨다. 옆에서 숙제하던 해나가 움찔했다.
' 우리 칼싸움하지 말자. 제발 당신은 칼을 뽑지 마시오. 부디 순순히 당신 잘못을 인정하시오... '
지금은 즐거운 명절 연휴다.
" 차 팔아야 하잖아. 이런 거 얘기 안 해도 당신이 알아서 하면 안 돼? "
아내의 칼도 반짝였다.
옆에서 숙제하다 움찔했던 해나가 또 움찔했다. 해나는 눈치가 빠르다. 공기가 찬 지 더운지 잘 읽는다. 숙제를 마치고 키즈카페 있는 마트에 가기로 했는데 어쩌면 그 계획이 어그러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 괜히 짜증 내고 있어... "
아내는 슬며시 칼집에 칼을 도로 넣었다.
아내답지 않게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게 보였다. 아내도 연휴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만 다시 뽑지 않으면 된다. 창밖에는 평화롭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눈 내리는 창밖을 마냥 쳐다보았다. 솟아오른 분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아직 피어나고 있었다.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내가 얼마나 나를 희생하면서 가족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날 저런 취급하다니... '
냉랭한 휴전에 돌입한 아내와 나는 해나를 데리고 ㅇㅇㅇ 트레이더스에 갔다. 서로 오가는 말들에 냉기가 완연했다. 엄마 아빠 사이의 온도를 느낀 해나는 말이 많아졌다. 자기 입김으로 쌀쌀한 공기를 훈훈하게 바꾸어보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카페테리아에서 밥 먹고 마트에서 먹거리도 사고 해나와 키즈카페도 가면서 한결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 못하는 내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 당신이 아까 나한테 한 얘기는 내가 차 청소 안 할 것 같으니까 하라는 말로 들러던데 맞아? "
푸트코트에서 피자와 파스타로 저녁을 먹으면서 말을 꺼냈다.
해나는 벌떡 일어나서 엄마와 엄마가 앉은 의자 등받이 사이로 몸을 숨겼다. 아내 허리춤에서 '스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슬 퍼런 칼날이 보였다. 한번 계속 얘기해 봐 하는 눈초리였다.
" 오늘 당신도 봤지만 내가 종일 집안 일 하고 있었잖아. 내가 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꼭 차 청소 하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말하면 안 되지. "
아내는 내가 평소 차 청소를 하지 못하는 것이 시간 날 때마다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아내의 반대 논리는 늘 동일하다.
" 내가 중요하다고 얘기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해야 할 것 아냐. 당신은 그런 게 없어.
당신이 말하는 그 집안일들은 나도 다 하고 있는 거고, 적어도 내가 얘기한 것들은 내가 다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당신이 챙겨야 할 거 아냐. "
아내가 반격하기 시작했다.
"내가 잊고 있으면 당신이 다시 한번 더 친절하게 말해주면 되잖아. 짜증 내지 말고."
"그럼 나보고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으라는 거잖아. 내가 다 신경 쓰는 게 힘들다고."
" 잠깐잠깐, 목소리 높이지 말고.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그런 일정들을 알아서 좀 챙기라는 말이지?
상대의 공격 포인트를 언급한다는 것은 더 공격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나 나도 수비만 할 수는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앞으로 해나 앞에서 나한테 그렇게 (불친절하게) 말하지 말라는 거야.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내가 당신한테 그렇게 얘기했으면 당신이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
"그만하자..."
아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언하며 앞에 놓인 식기들을 정리했다.
ㅣ 그런 게 바로 평화예요
얘기는 생각처럼 아름답게 흘러가지 않았다. 해나는 계속해서 엄마 뒤에 숨어 있었고, 논쟁은 찜찜하게 종료됐다. 그렇게 집에 도착했고 내가 해나를 씻기자 아내는 해나를 재우러 안방에 들어갔다. 2차전을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해나 재우면서 같이 잠자려고 했는데 아내가 먼저 들어가 버렸다.
' 이따 저 방문을 열고 나오면 또 한바탕 해야 되나? 아, 너무 피곤한데...
화장실에 있다가 아내가 나오면 슬쩍 들어가서 자야겠다. '
이런 생각을 하며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한 동안 흘러도 아내는 나오지 않았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TV를 틀어놓고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다가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자다가 눈을 떠보니 앞에 아내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 릴리가 앉아 있었다.
거실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밑에 깔린 내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늦게 잤는데도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아마 자는 둥 마는 둥 잔 것 같다. 오늘은 처가댁에 설을 쇠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씻고 머리를 매만진 후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오늘 하루는 분위기 좋게 잘 보내야 하는데 어쩌나. '
한숨이 푹 나왔다.
잠을 깨야 할 시간이 좀 늦어지는 것 같았다. 주방으로 가 식기세척기에 있는 그릇들을 꺼내며 소음을 일으켰다. 잠시 후 방문이 삐그덕 열리면서 163cm 거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거인은 긴 머리카락을 얼굴 쪽으로 늘어뜨린 채, 영화 '주온'의 주인공처럼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러다 휙 고개를 돌려 그릇을 손에 든 채 정지해 있는 나를 노려 보았다. 분명히 나를 노려 보았다. 거인이 갑자기 양팔을 좌우로 크게 벌리더니 나를 움켜 안는 것이 아닌가. 으아악!
" 미안하다. 새해를 맞아서 앞으로 내가 친절하게 말할게. "
거인은 아내였다. 거인답게 아내가 나를 품었다.
" 큰일이구먼. "
아무 말로 대답하고는 한 동안 뻘쭘한 마음을 어찌할 바 몰랐다.
간 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제 아내는 해나와 함께 먼저 잠자리에 들었을 뿐이다. 문득 내가 존경하는 어느 분께서 '평화'가 무엇인지 설명하셨던 내용이 떠올랐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죠? 그러다 화해를 하고 나면 어때요? 편안하죠? 그런 게 바로 평화예요.' 내 상황이 딱 이러했다.
우리 가정에 먼저 평화를 불러온 아내에게 내가 화답을 보낼 차례다. 아내는 내가 집안 돌아가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놀고 있지는 않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도맡아 하는 부분이 없다고 했다.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으니 결국은 자신이 모두 신경 쓰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펑크가 난다 했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내가 완전히 가져가서 자신이 신경을 끌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옛말에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지? 아쉽지만 나는 아내가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걸. 아내 바람대로 내가 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내도 이 사실을 진작에 눈치챈 것 같다. 체념한 듯 보이기도 하다.
확실히 나는 아내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다. 미안한 일이지만 아내에게 솔직하지 않은 내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아내가 기대하는 그런 사람인 척 흉내를 내볼까 한다.그렇게 아내를 한번 속여보려고 한다. 아내가 얘기한 것이 있으면 잘 기억하고 있다가 아내가 점검하기 전에 미리 진행해 보려고 한다. 아내가 얘기하지 않은 일도 잘 살피고 있다가 내가 먼저 처리해 보려고 한다.
이것 말고도 본래 내가 아닌 나로 행동해야 할 포인트들은 널렸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솔직하지 않은 내 모습을 보여줘도 될까? 가면 쓴 모습으로 지내도 되는 걸까? 고민스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제 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