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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짐 더미에 깔린 우리 집 (2/2편)

아내는 사오기라도 잘하지? 나는?

by back배경ground Mar 25. 2025

04화 4화. 짐 더미에 깔린 우리 집 (1/2편)


3장. 내장 비만의 진실

짐 덩어리를 다시 베란다에 넣어둘 수는 없다. 일단 안방 화장실로 옮겼다. 짐 덩어리 하나 옮길 때마다 분노의 기합을 발사했다. '어후'하는 포효 소리가 짐짓 커서 잠자고 있는 해나를 슬쩍 들여다봤다.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거실에 있던 아내도 듣지 못했다. 들었다면 "뭐야? 왜 그래?" 하면서 쫓아 들어왔을 것이다.


오밤 중에 말싸움이 펼쳐졌을지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싫지만 시간도 늦고 피곤한데 말싸움하기는 더 싫다. 이미 뒤엉커 버린 마음을 꾹꾹 누른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내를 지나쳐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아내를 지나쳐 안방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새벽 다섯 시, 알람 진동에 눈을 떴다. 닭이라곤 통닭집 밖에 보이지 않음에도 새벽은 찾아왔다. 살며시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옆에서 철퍼덕 엎드려 있던 트램펄린이 여덟 다리를 등에 올려놓은 채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제정신이 들었다. 간밤에 짜증을 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해나가 태어나면서부터 집 안은 해나를 향한 선물 공세로 금세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장난감들과 책들과 옷들이 밀려들었다. 누워서 바둥거리더니 기어 다니고 걸음마를 하더니 금세 뒤뚱뒤뚱 뛰었던 해나, 변화무쌍한 그녀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조공은 철마다 계속되었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장난감 크기는 컸다. 보행 보조기, 점핑 기구, 주방 놀이, 자동차, 시장 카트까지 가구 크기만 한 장난감들이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뿐인가? 영아, 유아, 유년 시절 별로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은 어쩜 그리 다양한지? 책장에 꽂혔다가 이내 박싱 되어 쌓여있는 전집들은 얼마나 많던지?


처가에서는 유일한 손주이고 본가에서는 두 번째 손주다 보니 혹여나 동생들이 생기면 물려줄까 싶어서 팔 생각을 못하고 이고 지고 있었다. 한 번 팔아볼까 생각하면 해나와의 추억이 서린 물건들을 차마 처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짐들은 점점 늘어나고 정리할 엄두는 점점 줄어들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해나가 억울하다. 해나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나와 아내도 자랐다. 옆으로 자랐다. 아내는 아가씨 시절에 입었던 예쁜 원피스들, 재킷들, 코트들, 샬랄라 소리가 나는 블라우스들이 많았다. 아이를 낳으면 골격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새로운 자기를 맞아들여야 했다.


나는 총각 시절에 옷이 별로 없었다. 가지고 있던 옷들도 몸에 착 맞는 게 아닌 풍덩하고 넉넉한 것들이었다. 한 마디로 아내 보기에 입고 다닐만한 옷들이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장만했다. 속옷부터 외투까지, 여름옷부터 겨울 옷까지 사들였다. 개과천선했다. 암울했던 내 과거는 그렇게 청산되어 갔다.


그리고 우리 집은 내장 비만이 되어 갔다.



4장. 빠진 만큼 채워진 상쾌한 공기


2월은 유독 힘들게 느껴졌다. 철이 바뀌려는 이유였는지 아니면 업무 스트레스가 누적된 탓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원 회사에서 서울 집까지 2시간가량 걸려 집에 들어오면 저녁 9시에서 10시 사이였다. 그 시간은 아내와 해나가 한바탕 지지고 볶음을 마치고 파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집에 들어서면 무슨 볶음 요리를 했는지 냄새가 났다. 거실 책상 위에는 교재와 노트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내와 해나가 숙제들로 한바탕 볶아 낸 현장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인형, 장난감,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해나가 자유시간으로 두 바탕 볶은 증거였다. 주방은 남은 음식들과 재료들 및 각종 도구들로 만원사례다. 아내가 세 바탕 째 볶았다.

해나가 씻기 전에 퇴근하면 내가 해나를 씻겼다. 내가 해나를 잠재울 때도 있지만 보통은 아내가 재웠다. 아내와 해나가 잠자러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거실은 복구공사가 시급해 보였다. 내일이 되면 이 좁은 공간을 넓게 살아갈 이들이 잠을 자고 있으니. 그 임무는 거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자의 몫으로 여겨졌다.

현장을 원상복구 시키는데 진심인 적도 있었다. 먼저 널브러진 책들을 종류 별로, 번호 별로 책장에 꽂았다. 장난감들도 하나하나 원래 있던 통에 집어넣고 장난감 선반에 잘 넣어 두었다.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도 말끔히 해 놓았다. 적어도 다음 날 부엌을 쓰기 편할 만큼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언젠가부터 거의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엔 난장 정도가 심해졌다. 그러기엔 너무 피곤해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오시는 이모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다. 수 년째 우리 집안 환경을 살펴주시는 이모님 덕분에 가정 평화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환경이 퍽퍽하면 감정도 딱딱해지면서 싸움 나기 마련이다.

이모님 찬스로 버티고 있는 우리 집 상황에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도무지 물건들이 버려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내와 나는 집 안에 물건들을 들였다. 이모님께서는 그 물건들을 어느 공간에 집어넣으셨다. 아무리 살뜰히 살펴주셔도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결정하실 수는 없으셨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물건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거실 귀퉁이에 잠자코 있던 트램펄린 옆을 지나쳐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2월이라 찬 공기가 차가웠다. 현관 앞에 있던 택배 봉지와 박스들을 현관 안쪽으로 들여다 놓았다. 외투의 지퍼를 목 부분까지 올렸다. 까끌까글한 느낌이 싫었다. 집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짐들을 그대로 두기도 싫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처리하리라 마음먹었다.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쇼핑백 하나가 열려 있었다. 그 옆에 옷더미가 작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위에는 하얀 털뭉치도 보였다. 오 마이 갓!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고양이였다. 김치통에서 김치를 꺼내 올리듯 조심조심 들어 올렸다. 심기가 불편한 듯 옅은 느야옹 소리를 내며 사라져 주었다. 남긴 털들은 수거해가지 않았다.

'왜 옷을 여기 쏟아놔 가지고...'
짜증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돌돌이를 넉넉히 가져와 옷들을 하나씩 펼쳐가며 고양이 털을 제거해 나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어제까지, 아니 방금 전까지 이 옷들은 쇼핑백 안에 있었다. 그대로 다시 넣어서 안방 화장실에 갖다 두면 오늘은 모면할 수 있었다.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고양이가 앉았던 것은 이런 나의 게으름을 간파하신 신의 계시였을지도...

돌돌이로 어루만진 옷들을 종류별로 나누어 보았다. 50리터 수거용 봉투를 찾아와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씻고 나온 아내가 소파에 앉아서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옷들을 보여주며 정녕 넣어야겠느냐고 물었다. 굳게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던 순간 그녀가 갑자기 소리쳤다.  

"어? 이 옷은 입어도 되겠는데?"
꼼꼼하게 한 장씩 살피면서 넣었던 보람이 생겼다.

"어? 이건 버리면 안 되지. 이모가 떠 준 옷인데..."
해나 옷더미를 정리할 때 아내가 외쳤다.

해나가 돌일 때 금손 이모가 분홍색 털실로 바지, 카디건, 모자를 떠주었지. 그걸 입고서 쌀과자를 입에 문채 찍은 사진은 아내와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웅다웅 지내오는 동안 짐더미들에 가려서 평생 간직해야 하는 물건들도 돌보지를 못했었다. 피곤하고 짜증스럽던 심신은 이내 상쾌해졌다.

"이 가디건 기억나? 유럽 여행 갔을 때 해나한테 입혔던 건데."
오랜만에 해나 옷들을 들여다보며 추억에 퐁당퐁당 빠졌다.

"기억나지. 우리 해나 너무 귀여웠는데..."

지금 이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던 지난 며칠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해나가 트램펄린을 꺼내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언제 맞이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웃고 얘기하며 해나 옷을 두어 벌 따로 챙겼다. 그 옷들은 우리 가족의 황금기를 보여주는 유물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다음 날이 되었다. 상쾌한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옷방에 들어가 내 옷들을 모조리 살폈다. 음식도 물건도 버리기 아까워하는 내가 꽁꽁 사들고 있던 옷들을 과감히 내려놓았다. 패딩들, 바지들, 니트들, 셔츠들... 조금 더러운 건 세탁도 했다. 세 봉지가 꽉 찼다. 도합 다섯 개의 기부용 꾸러미를 만들었다.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집안 구석구석에서 '얼음'하고 정지해 있던 가전기기들을 찾았다. '땡'을 외칠 시간이었다. 유선 청소기, 무선 청소기, 안마기, 토스터기, 다리미 등등 안 쓰거나 고장난 물건들이었다. 모아보니 한 무더기다. 가전제품 무상수거 서비스가 있다는 정보를 활용할 시간이었다.

여전히 우리 집은 짐 더미에 깔려있다. 많이 내보냈지만 아직 역부족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비워진 공간만큼 상쾌한 공기가 채워졌다는 점이다. 산에서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셔 본 사람은 그날을 기억한다. 그렇다고 당장 매일 산에 가게 되지는 않지만 오랜동안 기억에 남는다.

나도 그렇다. 아내는, 물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제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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