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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짐 더미에 깔린 우리 집 (1/2편)

아내는 어째서 사들이기만 하는가?

by back배경ground Mar 24. 2025

1장. "트램펄린 꺼내주세요."

"오빠, 해나가 트램펄린 꺼내달래."
퇴근한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해나가 초승달 눈을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지금은 안돼. 베란다 짐 다 꺼내야 되는데 너무 늦었어."
시간이 너무 늦어서였을까? 그 짐들에 손을 대는 게 두려웠던 걸까?

"우웅~ 아빠가 지금 안된대..."
아내는 나에게 공을 돌렸고, 해나 눈썹은 여덟 팔자로 바뀌었다.

"오빠... 해나가 트램펄린 꺼내달래..."
어라, 어디서 많이 들었던 소리다. 아, 어제였지. 한데 톤이 낮아졌다.

"해나가 하루 종일 얘기해 그냥, 어후."
해나는 상냥하고 착하게 말하지만 집요하고 끈질긴 구석이 있다.

"그래, 지금 꺼내줄게."
눈치 밥이 수년 째라 당장 해야 할 일과 아닌 일은 구분할 수 있었다.

컴컴한 안방으로 들어갔다. 전등을 켰다. 커다랗고 불투명하며 까끌까끌한 베란다 창문에 손을 댔다. 제발 열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스르륵 열렸다. 또 전등을 켰다. 아니, 베란다 전등 스위치를 찾기 위해 짐들을 헤집었다. 막대기를 집어 들고 저만치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딸칵' 소리를 내며 환해졌다.

어떻게 저 많은 짐들이 이 좁은 곳에 다 들어갔을까? 이모님 실력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이모님께서 집안일을 돌봐주신다. 이모님께서는 뭔가 짐스러운 물건들이 그 자리에서 오래 보이면 베란다에 넣어두셨다. 차곡차곡 쌓였다. 정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나와 아내 그리고 이모님 모두 대안이 없었다.

트램펄린은 바깥쪽 창문에 기대어 있었다. 안쪽 창문과 바깥쪽 창문은 1.5 미터 정도 거리. 하지만 그 사이는 베를린 장벽처럼 짐들이 쌓여 있어 쉽게 닿을 수 없었다. 설령 닿았더라도 트램펄린을 들어 올려 꺼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수 밖에는 없었다. 짐들을 하나씩 꺼내었다.

"으... 영... 차!"
한 손으로 창문틀을, 다른 손으로 트램펄린 끄트머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올라.. 올라.. 올라왔다!

"야~ 아빠가 트램펄린 꺼냈다."
아내도 해나도 팔짝폴짝 뛰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빠가 된 듯 한 기분이었다.

"어? 근데 다리는?"
아내가 묻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문어 다리와 트램펄린 다리는 여덟 개다.

"저 안에 어딘가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때보다 아빠가 된 상황에서 빽도할 수는 없었다.

하나, 둘 짐들을 더 들춰내기 시작했다. 내 성격상 다리 여덟 개를 잘 묶어서 근처 어딘가 두었을 텐데, 보이지 않았다. 보일 만한 상황은 아니었고 아무리 뒤적여도 만져지지가 않았다. 말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커지기 시작했다.

오늘 밤 아빠가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지 못하리라는 건 아내도 해나도 눈치챈 듯했다. 꺼낸 짐들은 안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해나가 자야 할 시간이 넘어버렸다. 힘껏 땅을 팠는데 다시 메우라는 군대 행보관님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도 닦는 심정으로 짐들을 일단 다시 쑤셔 넣었다.

소파에 앉아 정신줄을 붙잡으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해나가 잠이 들었나 보다. 나는 다시 컴컴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처음과 다르게 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열렸다. 대충 구겨 넣은 짐들이 창문에 걸리적거린 듯했다.

휴대폰 플래시를 어딘가에 비스드미 거치해 두고 문어 다리, 아니 트램펄린 다리 여덟 개를 찾기 시작했다. 도로 쑤셔 넣은 짐들을 도로 꺼냈다. 도로 쑤셔 넣은 짐들 말고 다른 짐들도 꺼내기 시작했다. 나와라. 나와라. 나으와라. 가만, 그런데 이 짐들은 도대체 뭐지?



2장. 짐 보따리의 정체

빨간 코스트코 쇼핑백, 허옇고 커다란 봉지들 여러 개가 뚱뚱하게 묶인 채로 놓여 있었다. 무겁고 푹신푹신했다. 일단 꺼냈다. 거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까지 짐들을 꺼냈다. 낡은 창고에서 무술 비급을 찾은 무협지 주인공처럼 작은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끈에 묶여 있는 바닐라빛 쇠막대기들이 그 안에 있었다. 얼마나 오래 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얼마나 애타게 자기를 꺼내 줄 주인을 기다렸을까? 감격스럽게 무술 비급을 꺼내 들고 거실로 나가 다리 다친 적토마처럼 엎드려 있는 트램펄린 위에 올려두었다. 내일 아침 너의 참주인이 너를 발견하게 되리라.

사실은 문어 다리를 하나하나 끼워서 트램펄린을 일으켜 놓았어야 했다. 그래야 10점 만점에 10점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다섯 시간도 채 못 자게 생겼다. 베란다에서 꺼내진 짐들도 치워야 했다. 10점 만점 받고 싶은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술 비급과 함께 세상 빛을 본 저 짐들은 어찌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점점점점 짜증이 올라왔다. 도대체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짐 덩어리들로 가득 차 있는가! 화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탓을 돌리고 싶었다. 우리 식구는 해나와 아내와 나, 이렇게 세 명이다. 거실에는 아내가 있었다.

푹신한 보따리들을 슬쩍 들여다보니 옷가지들이었다. 해나가 아기 때 입던 옷들, 아내가 예전에 입던 옷들, 하지만 이제는 입지 못하는 옷들로 쇼핑백이 빵빵했다. 이것들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대었다. 눈을 감았다. 보인다 보여. 이 짐 보따리들의 기원이. 옷가지들이 뭉쳐져 짐 덩어리를 이룬 우주의 신비가.

해나가 태어나고 해나의 물건들로 짐이 늘기 시작할 때 대대적으로 아내와 내 옷들을 정리한 적이 있다. 괜찮은 옷들이라 그냥 버리기는 아깝고 중고로 팔기에는 적당치 않아 고민스러웠다. 그러던 중 입을 만한 헌 옷들을 기부하면 받아주는 단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내가 아가씨일 때 입던 옷들을 꺼내었다. 거침없이 꺼냈다. 나는 커다란 박스들을 모아 와 아내 옷들을 차곡차곡 개어서 담았다. 거의 10박스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기부를 했더니 정기적으로 50리터 수거용 봉투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발견된 옷뭉치들은 그 일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아내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옷 정리를 했던 모양이다. 입히지 못하는 해나 옷과 입지 못하는 자기 옷들을 옷 방에서 꺼낸 모양이다. 그런데 수거용 봉투가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못 찾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급격히 귀찮아졌는지 커다란 쇼핑백들을 찾아서 일단 담아 둔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가 수거용 봉투를 찾아서 그날처럼 차곡차곡 담아주기를 기대했었으리라. 이 마음으로 그 꾸러미들을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옷 방 한 구석에 서로 쌓여있던 저 짐 덩어리들이. 기본적으로 게으른 나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 보아도 못 본 척 안 보아도 못 본 척했으리라.

내 손길이 닿지 않자 짐들은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옷방에서 뿌리를 내려봤자 잡초 취급밖에 받지 못한다. 이모님께서 이들의 생장 과정을 지켜보셨을 것이다. 잡초임을 눈치 채신 순간 그대로 뽑아 베란다라 불리는 창고에 넣어두셨을 것이다. 그게 언제 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화풀이의 대상이 정해졌다. 아내는 거실에 있었다. 거실에 있는 아내였다. 아내는 집 안에 물건을 들여놓는 데는 선수지만 도무지 내보내지를 않는다. 앉은자리에서 주변에 고개만 돌려봐도 아내가 사들인 물건들이 수두룩하다. 그녀는 도대체 왜 짐 정리를 하지 않느냐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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