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과감히 빼지도, 더 깊숙이 넣지도 못하는 못난 아빠
회사 셔틀버스는 혜화동에 있는 통계청 앞을 지난다. '혜화동에 통계청이 있어?' 하시는 분들은 국립어린이과학관과 창경궁 사이 언덕길을 유심히 보셔라. 경인지방통계청 서울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실 것이다. 그 앞을 수 백번은 오갔을 텐데, 나도 작년에야 이곳을 알게 됐다. '제1회 ㅇㅇ 사교육비 조사 실시'라는 현수막을 발견했던 시점이다.
'사교육비 조사를 하는구나. 저런 걸 이제 처음 하나 보네?' 사교육비 조사를 한다는 사실이 꽤나 인상적이어서 아내에게도 전했던 기억이 있다.
l 32조 4천억 원
며칠 전 인터넷에서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때 보았던 그 현수막이 떠올랐다. '그 조사가 지금 나왔나 보네? 시간 참 빠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결과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결과를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고 많은 현수막 중에 왜 그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을까? 평소 사교육에 대한 어떤 감정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멀리하고 싶지만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사이처럼 쉽게 가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무심한 척하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작년 한 해 들어간 초/중/고 사교육비는 29조 2천억 원이었다. 29조는 얼마만큼 큰돈일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TV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님 얼굴이 보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옆에 서서 무언가를 발표하는 듯했다. 트럼프 대통령 얼굴에는 특유의 흐뭇함이 만연했다. 현대자동차가 미국에 공장을 짓고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하는 장면이었다. 그 액수가 29조 원이었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처럼 29조 원은 트럼프 대통령도 웃게 만드는 그런 돈이었다. 그걸 매년 국민들이 사교육비로 쓰고 있었다. 학원에 내고 있었다. 유명 인터넷 강의 업체 국영수 일타강사 연봉이 평균 100억 원이라는데... 페이커 연봉처럼 범인들은 알 수 없는 영역이지만, 시장 규모를 보니 그럴듯하다. 가히 보암직 하고 먹음직 한 시장이다.
오 마이 갓! 뉴스를 더 찾아보니, 영유아 사교육비는 별도다. '그래, 내가 봤던 현수막은 제1회 영유아 사교육비 조사였어.' 대대적인 조사를 첫 시행할 정도로 무르익은 현실이 서글퍼 그 현수막이 눈에 띄었었던 것이다. 29조 2천억 원에 영유아 사교육비 명목으로 3조 2천억 원이 더 추가되었다.
l 32조 4천억 원의 일부
이실직고하자면, 우리 집 살림살이에서도 교육비가 한 자리 차지하는 편이다. 다른 집들과 비교할 때 많은지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작은 규모는 아니라고 본다. 일단 해나는 사립초에 다니고 있다. 나와 아내의 직장 상황과 육아 환경을 고려할 때 일찍 하교하는 공립 초등학교는 답이 없었다. 다행히 입학 추첨에 당첨되었다.
굵직한 게 하나 더 있다. 영어 유치원을 나왔고 지금은 연계된 영어 학원에 다닌다. 영어 유치원은 유치원이라 부르지만 사실상 학원이다. 유리구슬만 한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 옹기종기 다닥다닥 붙어 앉아 공부를 해야 한다. 진짜 유치원처럼 친구들과 뒹굴고 텃밭을 가꾸거나 선생님이 읽어주는 동화책 얘기에 푹 빠지는 경험은 없다.
현재 매주 한 번씩 배우러 가는 곳들은 다음과 같다. 수학 교과 학원, 수학 사고력 학원, 미술 학원, 스피치 학원, 방문 피아노 레슨, 지역 복지관 합창단. 인라인스케이트, 줄넘기 등은 잠시 다닌 곳들이다. 그동안 내가 해나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 아니, 않았었기에 전부 다 언급했는지는 자신이 없다. 교육비에 총얼마가 들어가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는 주거비와 사교육이 우리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원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도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 아픈 사람이 병원에서 돈 쓰기를 아끼지 않는 것처럼 자기 자식에게 돈 쓰기를 아끼지 못했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시골에서 소 판 돈, 전답 판 돈으로 자식 공부시킨 부모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수준은 선을 넘은 것 같다. 과연 돌이킬 수 있을까?
l 토요일
"우리가 언제까지 해나 숙제를 봐줘야 할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날 어떤 자리에서 아내에게 던졌다.
"해나 친구 엄마 얘기 들었지? 고3 때까지 봐주셨대잖아"
아내가 친구처럼 대답했다.
"해나를 이렇게 기르는 게 맞을까? 우리가 불행해질 것 같아."
아마도 종일 해나 숙제를 시킨 어느 토요일의 다음 날이지 않았을까 싶다.
"당신은 꼭 하루 숙제 봐주고 나면 그렇게 심각해지더라?"
아내가 진짜 짜증 난다는 듯 대꾸했다.
"..."
맞는 말이긴 했다.
"당신 말이 맞는데, 하루를 보면 우리 앞날이 그려져서 그래. 앞으로 이렇게 계속되면 해나도 우리도 불행해질 것 같아."
아내도 이 말에 선뜻 부정하기는 어려웠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좋은 대학교에 간다고 치자. 그때는 마땅히 취업할 곳도 없을 거야."
진심으로 학원들 배만 불리고 우리나라 발전에는 도움 안 되는 이 치킨 게임을 멈추고 싶었다.
"그럼 어떡해? 애가 뭘 특별히 잘하거나 관심 있어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에 재능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이 말을 끝으로 서로는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다.
서로의 답답한 마음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더 이어갈 말은 없었다.
그 토요일 하루는 이랬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간 해나는 아침 11시에 어린이 합창단에 갔다. 끝나고 점심을 먹고서 1시에는 미술학원에 갔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1시간 정도 놀고 집에 와서 오후 4시경부터 저녁 9시까지 공부를 했다. 학교와 학원 숙제가 늘 많은 데다가 무슨 시험 일정도 잡혔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중간에 밥도 먹고 농땡이도 피웠지만 책상 앞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보디가드처럼 나도 해나 옆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해나는 지쳐갔고 나도 지쳐갔다. 둘 사이가 서먹해졌다. 목석같은 아빠보다 장난기 많은 엄마가 절실히 그리웠을 것이다. 초인종이 울렸다. 아침에 나갔던 아내가 저녁이 되어 돌아왔다. 해나가 뛰쳐나갔다.
아내는 밝은 얼굴로 해나를 안아 주었다. 서로의 오늘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내 오늘 마쳐야 할 분량을 다 마치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해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혀졌다. 연예인이 스케줄을 놓쳤을 때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매니저의 책임이다. 해나의 보디가드가 엄마로 바뀌었다. 임무를 완수 못한 나는 낙오자가 되었다.
이런 일상이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다. 아내와 해나는 거의 매일이다.
아내도 얼마나 답답하랴...
l 자괴감
"전혀 바뀌지 않을걸..."
아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내가 보내 준 영상 봤어? 정치인들이 7세 고시를 막자고 성명을 발표했더라."
내가 이렇게 건넨 말에 돌아온 아내의 반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아내 말에 동의한다. 집단행동 양식이 자성적으로 변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 방향을, 그 속도를 거슬러 먼저 멈추는 사람은 제도권에서 벗어나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개인 스스로 이러한 결정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가족까지 동참시킨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초인적 의지가 필요하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거닐고 싶었다. 한데 주위가 웅성웅성하더니 걷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나도 함께 보폭을 맞췄다. 점점 더 속도가 빨라졌다. '어라, 왜들 이러지? 저 앞은 낭떠러지인데...' 옆을 보니 얘도 나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가 먼저 멈출 수가 없다. 혼자 남겨질 상황이 두렵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저 앞의 낭떠러지를 보라. 어느 나라들보다 공부를 많이 시키지만 국가 경쟁력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추격했다는 일본은 오랜 기간 겨울잠을 마치려고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중국은 여러 분야에서 미국을 넘어서는 실력을 보여준다. 믿었던 반도체는 대만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세계를 이끄는 리더들은 인도인과 중국인들이다.
우리나라는 어느 순간부터 나라 안 밥그릇 싸움에 매몰되었다. 아니, 그만 생각하자. 그만 생각하자.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일개 납세자인 내가 어찌한단 말이냐. 나 혼자라도 멈추지 못하고 덩달아 달리고 있는 주제에 누구한테 탓을 돌리려 하는가. 그저 낭떠러지를 향해 내달리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일단 만족하자.
그리고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하자.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