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고 준비하는 게 없어
며칠 전 카ㅇㅇ톡 상단에 어느 유명 호텔의 특가 광고가 떴다. 나는 곧바로 아내 생일을 떠올렸다. '여기 특가 행사하는데 당신 생일에 다녀올까?' 톡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원하는 날짜가 마감될까 초조했다. '이틀 전까지 무료 취소가 되니 일단 예약하겠소.' 한번 더 톡을 보내고 우선 결제를 했다. 앞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5월 15일 직전 주말과 직후 주말 두 날짜를 지정해 예약을 두 번 넣었다. 5월 15일은 아내의 생일이다.
잠시 후 아내에게서 답이 왔다. '나는 가든팜 디너 패키지가 더 좋음'. 살짝궁 의외였다. 그 호텔 별로더라며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답을 보내올 줄 알았다. 얼마 전 아내가 친구들과 그 호텔에 다녀왔었는데 그리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어조상 크게 반색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자고 했다. 예약해 놓은 키즈 패키지를 취소하고 새로 결제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아내를 잘 모르고 있다.
묻지는 않았지만 아내는 호텔 보다도 내 성의를 받아준 것 같았다. 나는 아내 생일에 무슨 이벤트를 준비한 적이 별로 없다. 실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먹고 싶다던 케이크를 사서 들어갔던 적은 있었다. 그렇지만 매년 아내 생일이라고 해서 의례히 신경 썼던 루틴이 없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아내 생일이 바로 내일이었다. 불행히도 이 모습은 단지 생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생일은 한 사람의 시작이자 기념일의 시작이다. 생일에 태어난 아내와 결혼을 하니 결혼기념일이, 함께 맞이하는 크리스마스가, 여름 가족 휴가 일정이 달력 위 굵은 동그라미 안에 갇히기 시작했다. 백마 탄 남편이 달려와서 동그라미 안에 갇혀 있는 기념일들을 훨훨 날아가도록 풀어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적인 해피엔딩이다. 우리 집에서는 그러한 해피엔딩을 보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로 아내와 참 많이도 싸웠다. 싸웠다기보다는 아내가 토로했고 분노했다. 객관적으로 내가 잘한 일은 없으니 아내의 쏘아붙임에 맞받아칠 수는 않았다. 그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 또한 지나가길 바라며 그 시간을 견뎠다. 아내의 핵심 공격 포인트는 이랬다. "당신은 날 위해서 뭔가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게 없어." 나도 괴로웠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하는 말대답이 내 안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내 생일이라고 해서 무슨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었나? 그럴싸한 선물이라도 받았나? 생일케이크에 초라도 한번... 아, 이건 매년 받았지. 생일케이크는 나도 해준 적 있으니 쌤쌤이라고 치자. 서로 엇비슷하게 무신경했던 것 같은데 왜 나한테만 비난을 하는 거야?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모두 본인 위주이면서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저러나...' 뚱한 표정에 감춰진 내 내면의 대사들은 냉소적이었다.
싸우다 못해 한 번은 아내가 시어머니를 찾아갔다. 오마나! 아내의 시어머니는 우리 오마니다. 명목상은 심심해서 들렸다고 했다. 참고로 아내는 신기하게도 어른들을 대하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다. 아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결혼 생활 중 하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시장 다니고 차 마시고 수다 떨고 하는 모습도 있었다. 여러모로 보기 좋고 내게는 부족한 그 재능을 바탕으로 우리 오마니를 찾아갔다. 그리고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걔는 원래 그렇게 무신경한 애다. 나도 키우면서 힘들었다. 속 깊은 네가 참고 이해해라." 오마니께 아뢰어 봤자 현실 안주형 답변 밖에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도 이를 예상치 못했을 리 없었지만 이런 말이라도 들어야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인다고 했다. 나를 세상에 내놓으신 분으로부터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들어야 위안이 된다니. 아내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확신하고 결혼했던 것이다.
우리는 12월 말에 처음 만나서 이듬해 11월 초 혼인 서약을 했다. 만 1년을 채 만나지 못하고 결혼했다. 혹자는 결혼 전 사계절은 만나봐야 한다던데 그 기준을 간신히 채운 셈이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한 번씩 보냈고 아내 생일을 한 번 챙겨주었다. 한 번 함께 여행을 갔고, 한 번 아내 가족 행사에 참석했다. 심지어 연예 시절과 크리스마스는 겹치지도 않았다. 그 단 한 번씩의 이벤트들로 아내는 내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결정적인 판단 착오는 연애 초반,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가 가족들과 함께 떠났던 해외여행에서 발생했다. 말로만 잘 다녀오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헛헛해서 선물을 하나 마련했다. 비행기 안에서 목베개를 하면 좋을 것 같았다. 보통의 두툼한 목베개가 아닌 목 뒤만 살짝 받칠 수 있는 콤팩트한 것으로 할머니,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아내 것까지 4개를 준비했다. 여행 떠나기 전날 전해 주었다. 아내가 환하게 웃었더랬다.
그랬던 내가, 그렇게도 갸륵했던 남자친구가 사실은 그런 사람이었던 거다. 내 입장에서는 그 한 번씩의 이벤트들이 한계치였는데, 아내 입장에서는 그 한 번으로 완전히 뒤통수 맞은 격이었다. 사람이 좀 부족한 것 같아도 먼저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좋아 보여서 선택했더니, 웬걸 그동안 사귀었던 사람들 중에 가장 못하더란다. 게다가 코앞에서 비교가 되는 동서는 처제에게 아주 지극정성이다. '아, 결혼 생활 쉽지 않네잉...'
그랬던 내가 아내 생일을 미리 떠올리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숙제를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관건이었던 코찔찔이 1학년 수준은 넘어선 듯하다. 그러니 SNS 광고에서 얻어걸린 호텔 특가 이벤트를 군말없이 받아주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다. 아직 참신한 이벤트를 찾아내는 단계에는 못 이르렀지만 장족의 발전이다. 그 사이 내 안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단지 흉내를 내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2편. 보고 배운 게 없어서(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