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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사교육 바닷물에 두 발 담긴 아이 (2/2편)

나는 아빠다. 해나의 첫 번째 선생님이다.

by back배경ground

l 숙제의 늪


"해나가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다더라..."

"왜? 몸이 너무 피곤하대?"

"아니, 일어나서 숙제해야 하니까 일어나기가 싫대..."


아내가 손수 만든 상황에 대한 제삼자적 고뇌였을까?




해나 초등학교는 공부 많이 시키는 학교로 소문나기로 작정한 다. 입학 설명회에 갔던 날, 교장 선생님은 빈말을 하지 않으셨다. 공부 많이 시키는 것에 힘들어하시는 부모님들은 지원하지 마시라는 말씀. 1학년 때는 학교 숙제가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2학년이 되니 숙제량이 제법 벅차다. 게다가 학원들까지 여러 곳 다니니 숙제도 비례해서 늘어났다.


숙제뿐만이 아니다. 학교와 학원에서 퀴즈, 단원 평가, 월간 평가, 레벨 테스트 등 이런저런 시험을 치른다. 시험은 평소 자기 실력을 체크해 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지만 입에 발린 얘기일 뿐, 평소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시험을 못 보면 말짱 허사다. 학교라는 명칭이 들어간 곳에 다니는 이상 공부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것이나 다름없다. 진짜 공부는 학교를 벗어나야 가능하다.


해나의 초딩 생활은 숙제를 이고 시험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이 모두 이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최소한 동전의 양면 중 한쪽은 될 것이다. 이고 지고 있다는 것은 어느 목적지까지 가야 함을 뜻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용써서 버텨야 하는 시간이다. 정말이지 아내와 해나는 용쓰면서 숙제와 시험 준비를 시키고, 한다.


용쓰는 것들 중 하나가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숙제라도 한 가지 하는 것이다. 그 아침은 학교 가는 날이든 학교 가지 않는 날이든 상관없다. 아내가 해나 친구 엄마들을 만나서 도무지 숙제할 시간이 없는다는 푸념을 늘어놓았었나 보다. 해나 친구 엄마들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기 전에 숙제 하나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K-엄마들이여...


저녁 9시쯤 퇴근하고 들어와도, 토요일/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도, 토요일/일요일 외출해서 돌아와도 숙제하고 있는 해나의 모습이다. 숙제하는 해나 앞에는 숙제시키는 아내가 있다. 숙제를 하는 사람도 죽을 맛이지만 숙제를 시키는 사람도 보통 맛은 아니다. 숙제를 알아서 흔쾌히 잘하는 아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리라. 보통은 아내가 거의 모두 해나 숙제를 봐준다.


아주 가끔 아내가 주말 일정이 있어 내게 해나를 맡기고 나가는 날이면 십중 팔구는 사달이 난다. 해나는 초2답게 스스로 흔쾌히 잘 숙제를 해내지 못한다. 나는 그런 해나를 대하다가 꼭 엄한 소리를 한다. 해나는 애먼 소리를 듣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빠 미워.'를 외친다.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내게 주어진 할당량은 여백의 미를 살린 미완성으로 남는다. 그 상태에서 아내가 돌아온다.


아내는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또 장난도 쳐 가면서 그날 해야 할 분량을 달성하기 위해 몰아간다. 그날 모두 마치지 못하면 다음 날, 다음다음 날까지 못다 한 숙제들을 끼워 넣으며 결국 끝마친다. 아이 숙제가 부자연스럽게도 아내와 내 사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도대체 당신은 왜 이렇게 하지 못하느냐며 내게 아내의 꾸지람이 더해진다.



l 마케팅 놀음


아직 천둥벌거숭이 해나는 자신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그저 엄마, 아빠가 바라는 듯한 모습을 맞춰주려고 애쓸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엄마, 아빠가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고, 또 싫어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 아빠는 좋아라 또는 싫어라 하는 모습을 올바르게 보여줘야 한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2학년이 되자 반에서 반장, 부반장을 뽑았다. 해나는 부반장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기뻤고 좋아라 했다. 한번 돌이켜 보자. 해나를 칭찬하고 축하해 주었던 포인트는 부반장이라는 타이틀을 딴 것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교단 앞에 나가겠다는 용기 그리고 연설을 준비하는 과정에 분명히 맞춰져 있었다. 부반장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서도 일러 주었다. 오케이, 이 정도면 통과.


해나 영어 학원은 고도의 사교육 마케팅 체계에 순응하여 반마다 등급이 정해져 있다. 1학년 때는 그런 게 없었는데 2학년이 되면서는 반이 나뉘었다. 해나는 상위 등급 반이 되었다. 우리는 좋아라 했고 칭찬했다. 영알못 인생의 설움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영어 책 읽기를 좋아하더니 혼자서 곧잘 따라갔다. 그런데 이 아이의 작은 마음 안에 두려움이 찾아들었다.


함께 유치원에서 올라온 올망졸망 세 친구들 중 한 명은 한 단계 낮은 반에 배정이 됐다. 우리 부부가 똘똘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아이인데 1학년 과정 중 어느 한 항목이 약간 부족했던 모양이다. 해나에게 내년에 지금 반에서 혹시 다른 반이 되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해나는 창피해서 다니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누가 해나에게 이 따위 것이 창피함이라고 알려주었나?


해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영어 학원 같은 반이 됐다. 수학 학원도 함께 다니려고 같이 테스트를 본 모양이다. 해나보다 한 단계 낮은 반으로 배정됐다. 친구 엄마는 아이를 다른 학원에 보냈고 우리 부부는 그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 수학이다. 말이 좋아 수학이지, 산수다 산수. 그런데 아이들은 업계의 마케팅 놀음에 놀아났다. 정부는 손 놓고 있었다. 누가 죄인일까?


해나는 한창 뛰어놀아야 할 값비싼 시간에 공부를 한다. 아이가 애쓴 만큼 달디 단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부모들이 이런 마음일 것이다. 기왕 고생한 것 조금 더 고생해서 좋은 결실을 맺게 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채근하게 됐다. 7세 고시가 그 단면이다. 어린 묘목에 너무 많은 비료를 들이부어도 뿌리가 썩는 법이다.


해나는 훗날 지금 이 시기를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해맑게 웃고 있을지 몰라도 커버린 언젠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공부라는 늪에 빠져 끔찍하기만 했다고 기억할는지 모른다. 그 앞에서 다그치던 엄마와 옆에서 방관하던 아빠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공부를 멈추게 할 수는 없겠지만 암울한 기억으로 남겨줄 수는 없겠다.


아빠로서, 해나의 첫 번째 선생님으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l 아빠의 책임


아이가 감당해야 할 공부량 점점 많아지는데 시간은 점점 부족해진다. 이러다가는 초2 해나가 짬 내서 노는 시간까지 빼앗으려 달려들 것만 같다. 더군다나 학원 마케팅이 빚은 살벌한 경쟁 체제를 해나는 육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사교육 바닷물에 두 팔이 담긴 해나가 밀려 치는 파도에 속절없이 젖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해나와의 관계를 어그러뜨리지 않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나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 관계를 어그러짐은 화를 낼 때 시작된다. 혼을 낼 수는 있겠지만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비교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내 기준과 비교해서는 아니 된다. 숙제는 꼼꼼하게 하는 것이고, 공부는 성실하게 하는 것이며, 시험은 잘 보는 것이라는 망상은 버리자.


숙제하는 아이의 손에 주목하지 아니하고 얼굴에 주목하겠다. 해나 얼굴에서 순도 100%의 웃음기가 그대로 있는지 세심하게 관찰하겠다. 그러려면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감독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마냥 예뻐해 주고 바보처럼 웃어주고 잘한 것에 칭찬하고 못한 것은 눈감아 주어야겠다. 해나만 알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처럼 보여야겠다.


해나가 공부를 하는 동안은 자신의 깜냥에 도전할 수 있도록 응원해 줘야겠다. 공부는 결국 자기를 거스르는 과정이다. 하고 싶은 만큼 공부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 공부하는 것이 맞다. 깜냥은 자신의 최대치에 근접하는 것이므로 깜냥만큼 하기도 쉽지 않은 길이다. 초등학교 2학년 해나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이끌어 주련다. 할 수 없는 만큼을 밀어 넣지는 않겠다.




지름길로 빨리 산 정상에 올라 '야호' 외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이 사람을 집중한다. 오르는 동안 세르파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산 정상에 서서 이야기한다. 이 산은 어떤 산이고 어떻게 올라와야 하는지 설교한다. 사람들은 그 길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그 길로 오른다. 길에 나 있던 풀들은 파이고 돌들은 떨어져 나간다. 길이 미끄러워지고 사람들이 미끄러진다.


산 둘레를 둘러둘러 올라온 사람이 있다. 그는 시간이 늦고 힘이 빠져 아직 산 꼭대기에는 오르지는 못했다. 산 정상에 서지 못하다 보니 세상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도 역시 산에 대해서 배웠다. 이 쪽에는 완만한 경사로가 있고 저 쪽은 골짜기가 있어 가파르다는 것, 이 쪽은 비가 오면 땅까지 휩쓸리지만 저 쪽은 골짜기 사이로 물이 빠져나간다는 것을 안다.


해나야, 아빠는 산 둘레를 둘러둘러 올라가는 중이란다. 산 정상에 선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겠지만, 해나에게 귀감이 되는 어른이 되고자 노력한단다. 그래서 아빠도 졸린 눈 비비며 공부하고 밤늦도록 글을 쓴단다. 같이 공부할게. 해나는 어쩔 수 없겠지만, 훗날 해나가 엄마가 되었을 때 우리 손주는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꿈꾸며, 아빠가 열심히 공부할게.


무엇보다 해나한테 너무너무 미안해.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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