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보다 반박자 빠르게 차 청소하기
처가댁을 향하는 마음은 이야에로 가벼웠다. 미스코리아 분들께서 논하신 세계 평화를 몸소 느낀다. 일상의 모습이 이어지는 것.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할 수 있는 것. 어떤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평범함에 머무를 수 있는 것.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기적이지만 기적인 줄 모르는 것. 이것이 바로 평화였구나.
가만, 평화의 반대는 뭐지? 불화인가? 틀리 건 아닌데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얘기처럼 들린다. 돈이 없는 것과 빈곤은 좀 많이 다르잖아. 평화의 반대는 난리(亂離)가 아닐까? '난리 났네 난리 났어' 하고 말하는 그 난리. 우리말로는 뒤집히고 어지러운 상태. 어느 날 해나 방에 들어가 보니 장난감 선반이, 책장이, 옷장이 모두 쓰러져 난장판이 된 모습을 보았다면...
그런 상황이 눈앞에 벌어졌다고 상상해 보자.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원상복구 시키려면 힘내야 하는데 도무지 힘이 안 난다. 좋은 밥 먹고 만들어 낸 에너지를 겨우 일 뒷수습하는데 써야 할까? 굳이 에너지를 써야 한다면 불청객이 해나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데 써야 한다. 혹여 누군가 해나 방에 들어왔더라도 책장을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막는데 쓰는 게 옳다.
아내를 속이는데 에너지를 쓰려는 것도 바로 이런 차원이었다. 처가댁에 다녀오던 날 저녁, 원자력 에너지의 힘이 솟았던 메칸더 브이처럼 나는 장모님 밥상 에너지의 힘을 내게 된다.
l 모먼트 오브 트루쓰, 진실의 순간
성황리에 가족 모임을 마쳤다. 이제는 각자 보금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해나가 헤어짐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8년째 집안에서 홀로 손주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나. 재롱둥이 역할을 홀로 감내했던 스트레스가 컸던 걸까? 산책 나왔다가 들어가기 싫어 버팅기는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사모하고 사랑하는 둘째 이모와 이대로 헤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모 집에 가서 더 놀고 싶다..."
이모 집은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거리다.
"안돼. 시간이 많이 늦었어. 내일 아빠 할머니댁 가려면 가서 자야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 안에 반드시 데리고 가겠다는 의지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따가 엄마가 데리러 오면 이모 집에 데리고갈 수 있는데~"
언니를 잘 알고 있는 처제가 웃음을 지으며 떡밥을 던졌다.
"그래 해나야, 아빠가 이따가 데리러 갈게."
예쓰. 아빠가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했다.
"아빠, 나 이모차 탈게."
해나는 뭔가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인사하고는 이모 차에 올랐다.
아내와 나만 차를 타고 돌아왔다. 둘만 있으려니 어젯밤에 있었던 사건이 퐁당퐁당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나 한 번, 아내 한 번. 아내 한 번, 나 한 번. 그 어색함을 서로 모른 척 숨긴 채 해나 이야기를 나누며 집에 당도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는데 해나가 없다니, TGIF, 땡스 갓 잇츠 프리덤이 아닌가. 우리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은 티비 리모컨을 잡는 일이어야 했다.
아내는 외투를 벗어던지고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쥐었다. 자,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이 바로 MOT, 모먼트 오브 트루쓰, 진실의 순간이다. 말과 행동이 과연 같은지 다른지 검증되는 순간이다. 나는 침착하게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티비 화면에 유혹당하지 않도록 눈길을 아래로 내리고 청소기와 쓰레기 봉지를 챙겼다. 차 키도 집어 들었다. 카시트도 빼야 한다 했던 아내의 외침을 떠올리며 구르마도 몰고 갔다.
'어라? 웬일이래.'
혼잣말하는 아내 얼굴이 엘리베이터 내부 스크린에 비쳤다.
ㅣ 이렇게 멈출 수 없어
원래 세컨 카였던 차의 왼쪽 뒷문을 열었다. 해나의 카시트가 놓인 곳.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저기에 앉아 고개를 기대우고 잠을 잤었지. 집에 도착하면 안전벨트에 걸린 팔을 살살 빼내고 축 쳐진 해나를 조심조심 안아 올렸지. 평범했던 장면들이 스쳐갔다.
'딸깍, 딸깍'
이 차에서, 이 자리에서 함께 했던 오랜 시간은 두 번의 효과음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시즌1을 마쳤다. 시즌1 제목은 '해해'였다. 카시트를 꺼내어 구르마에 싣고 새로운 세컨 카로 가져갔다. 카시트를 설치했다. 해나는 새로 맞이한 새컨 카에 '냥냥'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시즌2 제목은 '냥냥'이가 될 것 같다.
다시 '해해'에게로 돌아와 트렁크를 열었다. 와우, 여기는 트렁크인가 쓰레기통인가. 돌덩이가 들려 올려진 벌레들처럼 온갖 물건들이 와글댔다. '너희들 좋은 시간도 끝났구나.' 온갖 종류의 우산부터 시작해서 오래된 신문지, 출처 불명 프린트, 목욕탕 의자, 햇빛 가리게, 돗자리, 막대기 등 모두 끄집어냈다. 구르마에 한가득 쌓였다. 어떤 이의 트렁크를 보면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물건들도 잘 박싱 된 상태로 정리되어 있던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트렁크 바닥에 달라붙은 흙먼지를 청소기로 긁어냈다. 깔끔하게 흡입되지는 않았지만 점점 깨끗해졌다. 이제 틈 사이사이에 낀 쓰레기들을 치울 차례였다. 틈새용 꼬다리로 갈아 끼우고 청소기를 돌렸지만 틈 사이 친구들은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과학문명이 요술램프 지니처럼 보여도 정말 가려운 2%를 채우지 못할 때가 많다. 마침 트렁크에서 꺼냈던 정체 모를 쇠꼬챙이가 눈에 띄었다.
의자와 의자 사이에 쇠꼬챙이를 집어넣어 바닥까지 내리고 사이다병 뚜껑을 따듯 튕겨 냈다. 뭔가가 걸리는 듯하더니 의자 아래로 험한 것들이 튕겨져 나왔다. 오래 묵은 것들이었다. 젤리 봉지였고, 사탕 막대기였고, 헬로키티 모양 메모지였고, 티니핑 스티커였고, 장난감 팔찌 같은 것들이었다. 쓰레기였는데 마음으로는 버리고 싶지 않았다. 넓은 창고가 있다면 박스에 잘 담아서 선반 위에 올려두고 싶었다.
나는 덜렁대면서도 꼼꼼한 성격이다. 흘리고 놓치는 것들도 많지만 한번 손을 댄 일은 제 풀에 쓰러질 정도로 꼼꼼하게 보기도 한다. 특히 청소할 때가 그렇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간단히 청소하려고 했다가 방 전체를 뒤엎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날도 그랬다. 휴대폰 후레쉬를 사이사이 비춰보며 뭔가 색깔이 보일 때마다 갖은 방법으로 꺼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나 데려와야 되는데..."
아내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불안해 보였다.
"응, 데려와야지."
해나 앞에서, 처제 앞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놔둘 수는 없는데...'
카트에 쌓여있는 짐들, 아직 꺼내지 못한 틈 사이 추억들이 눈에 밟혔다.
"같이 갈까?"
"... 그럴까?"
좋아하는 노랫말이 외이도 안쪽 내이도 언저리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이렇게 멈출 수 없어. 버킷리스트 다해 봐야 해.' 그래, 청소를 이렇게 멈출 수는 없었다. 아내가 내려온다니, 희망이 보였다. 아내는 그리 모진 사람이 아니다. 아내가 내려왔다. 여전히 트렁크와 차 문을 열어젖히고 청소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구르마도 보았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나 혼자 갔다 올까?"
"...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희망은 결실을 낳는다. 아내 혼자 출발했다.
청소 시간이 더 주어졌다. 아내는 빨리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지. 쉽게 따라올 해나가 아니지. 더 이상 쓰레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걸레로 닦아내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다행히 걸레는 챙겨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만하자. 차 트렁크를 닫고 정리하려는데 저만치서 자동차 엔진음이 들렸다. 저 차에 해나가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동물들은 쓰나미 징조를 먼저 느낀다지? 정말 신비롭다.
거둬들인 쓰레기와 청소도구를 구르마에 싣고 차가 멈추는 곳으로 향했다. 해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건 또 무슨 재밌는 상황인가 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에이, 지지." 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손을 뻗어 쓰레기 봉지를 뒤적였다. 언제가 아꼈었던 동물 모양 팔찌를 건져 올렸다.
"이거 버리게?"
"아빠가 씻어서 줄게."
ㅣ 차 청소가 끝나기 무섭게
다음 날 아내는 시댁으로 갔다. 해나는 아빠 할머니 댁으로 갔다. 나는 부모님 댁으로 갔다. 필연이었을까? 셋은 한 곳에서 만났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나가서 점심을 먹었다. 돌아와서는 과일, 한과, 빵 등을 펼쳐놓고 먹었다. 배부른데 또 들어간다느니, 저녁 먹어야 하는데 큰 일이라느니 하는 영혼 없는 얘기들이 오갔다. 그 사이를 뚫고 아내가 환호성을 질렀다.
"얏호, 누가 입찰했다."
차 청소 끝나기가 무섭게, 아니 어쩌면 차 청소하러 내려간 순간 아내는 '헤이, ㅇㅇ'에 차를 매물로 올려놓았나 보다. 아내 때문에 딜러 분들은 구정 연휴였음에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셔야 했다. 아내 덕분에 딜러 분들은 구정 연휴였음에도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가족들과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여러 딜러분들이 우리 '해해'에게 관심을 보이셨다. '해해'의 가치가 점점 올라갔다. 마침 차를 팔려고 생각했던 큰 누나도 '헤이,ㅇㅇ'에 차를 내놓았다.
맞아요. 여러분 말씀이 맞아요. 차를 매물로 올리자마자 딜러가 입찰하는 순서가 아니죠. 실은 아내가 시댁으로 출발하기 전, 해나가 아빠 할머니 댁에 가기 전, 내가 부모님 댁으로 출발하기 전 자동차 평가사 분이 오셔서 우리 차를 꼼꼼히 점검하셨다. 그분은 인천에서 오셨다. 우리 지역 담당자분이 아니신데 대타로 오셨다 했다. 차 청소가 끝나기 무섭게, 어쩌면 차 청소하러 내려가던 때 아내는 차량 감정 평가를 예약한 것이다.
인상 좋아 보이시는 평가사분께서는 우리 '해해'의 이는 깨끗한지, 다리는 튼튼한지, 눈빛은 똘똘한지 자세히 살펴보셨다. 어찌 보면 로마제국 노예시장에서 일어나던 장면 같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해해'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가는 출발점으로 보기로 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마지막 선물을 전해 줄 어떤 이를 만나러 가는 순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긴 줄만 알았던 짧은 연휴가 끝나고 나는 출근했다. 아내에게서 카톡이 왔다. '해해'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이 담겨있었다. 해나는 학교에 가기 전 '해해'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스쿨버스가 오기 직전이었지만 빨리 가서 인사하고 오겠다며 지하 3층을 눌렀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층층마다 엘리베이터가 섰다고 했다. 해나가 조용히 지하 3층을 취소하고, 1층을 눌렀다 했다. 스쿨버스를 타러 가면서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고, 그날 밤 아내는 나에게 그렇게 전해 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