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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orba Oct 10. 2023

크고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 수없이 많은 파도를 넘다

발리살이 (8)

발리 공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꾸따라는 지역이 있다. 그리고 꾸따 해변은 발리 내에서도 초보자가 서핑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있다. 다음 주에 파도가 조금 더 센 짱구 해변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초보자를 좀 벗어나자는 마인드로 3번 정도 서핑 수업을 받기로 했다. 클룩에서 찾은 27 Surf School에서 강습을 받았고 가격은 한국 돈으로 1만 5000원 정도? 생각보다 굉장히 저렴했다. 나를 전담으로 가르쳐줄 비치보이는 레쟈였는데, 몸이 딴딴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40이 넘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1일 차

오후 일정을 위해 아침에 눈 뜨자마자 꾸따 해변으로 달려갔다. 서핑을 한 5~7번 정도 해보았는데, 초심자의 마음으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꾸따 해변은 한국과는 다르게 물이 그렇게 차지 않고, 작은 파도가 꾸준히 치고 있어서 초심자로서 서핑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레쟈는 얕은 물에서 깨진 파도에 나를 연습시켰고 처음에는 꾸준히 밀어주었다. 생각보다 무게 중심이 뒤로 가 있어 보드가 가다가 중간에 서는 걸 보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하라고 말해주었다. 일어서는 것과 중심을 잡는 것은 꽤나 잘했다. 레쟈 말로는 밸런스가 아주 좋다고 한다. 몸을 낮추는 것은 잘하겠는데 허리를 피는 게 잘 안된다. 꾸준히 의식하고 고쳐나가야지.. 이전에 한국에서 서핑을 했을 때는 파도도 많이 안치고 몇 시간 동안 서핑 보드에 올라간 횟수가 한 손에 셀 수 있을 만큼 적어서 재미를 못 느꼈는데, 역시 발리의 해변은 달랐다. 벌써 내일이 기다려졌다.


2일 차

어제 약간의 감을 찾았기 때문에 레쟈가 밀어주는 대신 나 스스로 페달링을 하여 파도를 탔다. 부서진 파도라 그런지 이제는 서핑보드에 올라가서 파도를 타는 것을 곧잘 해낸다. (꾸따의 파도가 워낙 좋아서 일 수도) 레쟈가 일직선으로 가는 건 굉장히 잘하니, 방향을 틀어보라고 했다. 시선과 힘을 원하는 방향으로 주면 알아서 돌아간다고 한다. 파도가 약해서 그런지 왼쪽 오른쪽 할 것 없이 자유자재로 턴을 성공했다. 이제 방향 전환도 잘하니 내일은 레쟈가 큰 파도를 타자고 한다. 너무 기대된다.


3일 차

결전의 날이다. 오늘은 아침이 아닌 해가 중천에 떠 있는 3시 정도에 서핑을 했다. 큰 파도를 잡는 라인업이 좀 멀리 있어서 레쟈도 오늘은 자기 서핑보드를 가지고 갔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서핑이란 이렇게 힘든 것이구나라는 걸 온몸으로 체험했다. 라인업까지 가는데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와서 그것들을 전부 내 서핑보드와 함께 넘어야 했다. 해안 근처에 파도는 거의 다 힘이 약해져서 그래도 수월하게 걸어서 넘을 수 있었다. 지면에 발이 닿지 않기 시작하자 보드에 올라타서 페달링을 열심히 했다. 소용없었다. 파도가 오면 뒤로 밀리고 열심히 다시 페달링을 하면 또 파도가 오고. 내 페달링의 힘이 약해서 그런지 계속 제자리걸음이다. 파도를 거스르는 것은 너무나도 험난하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파도를 연속으로 15번 정도 맞고 나서 녹아웃이 되었을 무렵 바다가 잔잔해졌다. 저 앞에서 레쟈가 지금 빨리 페달링을 하라고 한다. 팔이 부서져라 겨우 라인업까지 도착했다. 보트를 돌려서 발리에서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테이크오프를 했다. 황홀한 경험이었다. 파도가 떨어지는 그 순간을 온전히 느꼈다. 마치 잠시 동안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몇 초 뒤 그다음 파도가 나를 밀어주었다. 몸을 낮추고 방향 전환을 하면서 끝가지 파도를 탔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서핑은 서핑이 아니었다. 오늘 나의 서핑은 새로 태어났다. 라인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파도를 넘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던 것일까? 이전보다 힘이 더 나는 것 같았다. 그다음에는 레쟈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테이크오프를 하고 더 좋은 자세로 파도를 탔다. 이 맛에 서핑을 하는구나... 욕심이 생겼다. 더 잘하고 싶어졌다. 다시 수많은 파도를 뚫고 라인업을 가서 적절한 파도를 타려고 했다. 그대로 고꾸라져버렸다. '아.... 이거 진짜 힘들게 왔는데.' 나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는 순간에 그만 좌절했다. 레쟈의 말로는 페달링이 너무 약하다고 한다. "You need to be strong" 신체적 한계가 오는 시점이었다. 서핑을 잘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느꼈다. 다시 파도를 넘어서 거슬러 올라가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에겐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계속해서 큰 파도가 몰아치는데 아무리 터틀롤을 하며 서핑 보드를 뒤집어봐도 그냥 매가리가 없이 휩쓸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라인업에 도착했다. 레쟈한테 너무 힘들다고 말했더니, 짱구 가면 이것보다 더 힘들다고 대응해 줬다. 그 말을 듣고 오기로 페달링을 더 세차게 하여 다시 한번 좋은 파도를 탔다. 역시나 황홀했다. 힘들었기 때문에 더 가치 있는 파도였다.


고통이 있어야 행복이 있다. 1시간 30분 동안 서핑했는데 1시간 25분 정도를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며 수없이 많은 물을 맞는 고통을 감내했다. 팔은 부서질 듯이 아팠고 몸은 여기저기 쓸려서 너무나도 따가웠다. 그럼에도 그 5분간의 서핑은 나에게 지난 이틀보다 더 큰 행복을 안겨다 주었다. 그동안 너무 편한 것만 찾아왔기 때문에 행복의 크기가 작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오랜 시간의 등산 끝에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이 아름답듯이, 오늘의 서핑은 나에게 더 큰 행복의 조건을 상기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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