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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orba Oct 12. 2023

발리 최악의 날을 아무쪼록 잘 버텨내다

발리살이 (9)

발리에 와서 여러 루틴을 만들고 있다. 현재 나보다 더 멋진 모습을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내면과 외면이 동시에 성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힘들더라도 맨몸 운동을 매일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주전부리를 멀리하고 있다. 매일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쌓고,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지금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이것을 습관화하여 1년이 지나면 나 자신이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한편으로는 기대도 된다. 이 사소한 루틴들을 반복한 지 어연 2주가 지났다. 항상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지금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는데, 지금은 분명하게 '네'라고 얘기할 수 있다. 시작이 좋다.


짱구에서는 6시 반부터 2시간 서핑을 하고 9시에 일을 시작하려는 루틴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힘차게 6시에 기상하고 해변으로 갔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오늘이 발리에 온 후 최악의 날이 될지는. 우선 꾸따보다 서핑 강습 가격이 2배나 비쌌다. 짱구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동안 내가 타던 균형을 잡기 쉬웠던 소프트보드 대신 하드보드를 추천해 줘서 그것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 파도가 치는 라인업이 너무 멀어서 페달링을 진짜 엄청 힘들게 해야 했다. 파도를 타러 도착하니까 진이 다 빠져있었다. 오늘 나를 강습해 주는 비치보이는 켈빈이었다. 첫 번째 파도를 타려는데 균형을 못 잡고 넘어졌다. 오늘 날씨가 안 좋은 건지 짱구가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파도를 적어도 5~10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파도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그런데 매번 탈 때마다 계속 넘어지고 제대로 못 탔다. 그렇게 잘 잡혔던 밸런스가 계속 무너졌고 파도의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그 와중에 몰아치는 파도를 넘는 과정에서 보드가 쓸려나가는 것을 잡기 위해 팔로 꽉 잡다가 파도가 너무 센 바람에 팔이 순간적으로 쫙 끌려나갔다. 그다음부터 왼쪽 팔 관절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었지만 오늘 '하나만 타보자 하나만!' 하면서 계속 노력해 봤지만 결국 제대로 일어설 수 조차 없었다. 서핑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켈빈은 별 다른 조언도 없이 그냥 보드가 너한테 안 맞는 것 같다고만 반복했다. 야속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예정되었던 2시간이 지났다. 마지막 파도만은 꼭 성공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파도가 너무 세서 보드에 눈 옆이 부딪쳤다.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눈가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고 왼쪽 팔은 움직이기도 버거웠다.


샤워를 마치고 일을 시작했다. 아침에 서핑이 계속 생각나서 안 되겠다 싶었다. 밖에 나가서 카페에서 커피 좀 마시면 일을 하자. 오늘 코워킹 스페이스에 한번 가보자 하는 마인드로 가장 유명한 아웃포스트로 향했다. 그런데 이미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혼이 나가 있었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땅만 보며 길을 건너다가 마주 오는 오토바이에 하마터면 치일뻔했다.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만 내뱉었다. 아웃포스트는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다. 하루 이용권이 2만 3천 원이라니.. 바로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정오 즈음에 돌아다니다 보니 너무 더워서 근처 카페로 향했다. 다행히 콘센트가 있어서 자리를 잡고 카페라테를 시키니 좀 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카페에 계속 있어도 시원해지지 않고 짜증만 계속 났다. 결국 나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숙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는 길에 또 혼을 놓고 있다가 앞에 급정거한 오토바이를 살짝 박고 말았다.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발리뿐만 아니라 근 몇 달간 최악의 날을 경험하고 있었다. 근데 뭔가 혼자 있으니까 더 외로워졌다. 옆에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그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나아졌을 텐데... 그 찰나에 발리 여행 오픈톡방에 짱구에서 삼겹살 드실 분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사실 극 I라 그런 모임에 잘 참석을 안 하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연락을 드리고 퇴근 후 삼겹살 집으로 향했다. 나까지 총 4명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사실 다른 것보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만으로 오늘 있었던 모든 안 좋은 일들이 잊혔다. 음식은 그저 그랬다. 그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음식은 언제나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랑 먹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니까. 오늘 하루종일 긴장한 상태로 정신없이 다녔는데,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한층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 책 읽고 운동하는 루틴은 깨졌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약간의 변화는 오히려 하루를 더 값지게 만들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정신없는 상태로 아무 잘못도 없는 발리를 원망하며 외로움 속에서 잠을 청했을지도 모른다.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 사람들로 인해 나쁜 하루를 잘 마무리했음에 감사하다. 내일은 좀 더 나은 하루가 펼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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