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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Aug 29. 2023

아내가 시집살이를 끝내던 밤

청평호숫가의 추억

“당신 여기가 어딘지 기억 안 나?” 

    

아내와 청평호숫가를 드라이브하고 있었습니다.     

 

호수가 잘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습니다. 언젠가 한 번 왔었던 곳인지 풍경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차에서 내려 경치를 구경하는데 어느덧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얼굴도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노을빛 물든 아내의 얼굴을 가까이 바라보기도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흰머리 나부끼는 주름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왠지 가슴 한구석이 짠해졌습니다. 

     

당신 잠깐 거기 서 있어. 내가 사진 한 장 찍어줄게.      


사진을 찍어주다 퍼뜩 여기가 어딘지 기억이 났습니다. 아. 여기가 바로 거기였구나.


           

***   



벌써 한 사십 년도 훨씬 전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직 신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신혼답지 않은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많은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챙겨야 할 시집 식구들이 조카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이십 명 가까운 대가족이었습니다.    

  

시외할아버지. 시외할머니. 시어머니. 시아주버니. 시동생들. 시외삼촌. 시외숙모. 시이모님. 시조카들…

      

이십 대 어린 새색시가 그 많은 시집 식구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금 젊은 사람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인 1980년대로 돌아가 생각해본다고 해도, 그건 아내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붙임성 있고 싹싹한 아내는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외할머니가 처음 본 손주며느리를 끔찍이 예뻐하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식구들이 바글바글한 집구석이다 보니 아무래도 바람 잘 날 없었습니다. 작은 갈등과 오해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며 늘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아내의 시집살이 스트레스도 좀 풀어줄 겸 청평호수로 훌쩍 드라이브를 떠났습니다. 요새처럼 자가용이 있을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택시를 한 대 빌려서 타고 다녔습니다.   

   

차창 밖 경치를 물끄러미 구경하던 아내가 그만 차에서 내려 걷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아내 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  


        

택시를 그냥 돌려보내고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호숫가 외진 길을 둘이서 팔짱 끼고 걸었습니다. 한참 걷다 보니 어느덧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야. 여기 경치 좋다. 우리 여기 서서 구경하고 가자. 아내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발아래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옆얼굴을 바라보니 어느덧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있었습니다.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도 노을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노을빛은 여인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만들어줍니다.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아내의 얼굴도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이 슬퍼 보였습니다. 지치고 그늘진 얼굴이었습니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짠해졌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에게 더 이상 시집살이를 시키면 안 되겠구나. 이제는 그만 분가해서 나가 살아야겠다. 

     

아버지 없이 혼자 사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평생 어머니를 모시고 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을빛 속에 슬퍼 보이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호텔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저 호텔 방에선 강이 더 잘 보일 것 같았습니다.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말고 저 호텔에서 자고 가자. 

     

식구들 밥은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는 아내의 손을 잡아 이끌고 호텔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호텔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   


       

벌써 사십여 년 전의 추억입니다. 사십여 년 전의 그때 그 자리에 부부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아내의 얼굴은 이제 늙고 주름진 얼굴이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긴 머리카락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당신 여기가 어딘지 기억 안 나? 저 호텔은 생각나지?     


아내가 멀리 호텔을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맞아. 이제 생각나. 아주 오래전에 왔던 곳이네.   

  

아내와 나란히 손잡고 발아래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물을 아스라이 바라보았습니다. 사십여 년 전에도 부부가 나란히 손잡고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물을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사십 수년 전의 어느 날 우리 부부는 멀리 바라보이는 저 호텔 방에서 긴긴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밤새도록 강물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마 꽤 뜨거운 밤을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정말 분가해서 어머니 집을 나왔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아내가 어떻게 그리 빨리 시집살이를 끝낼 수 있었을까? 


……………   

  

…그건 아마도    

  

그날 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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