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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Sep 23. 2023

우리는 사십년 째 연애 중

지금 아내를 만나러 갑니다.

소리 다방으로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  


          

오늘은 명동에서 합창 연습이 있는 날이라 아내가 아침부터 서두르고 있습니다.    

  

“먼저 가. 이따 소리 다방에서 만나.”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아내의 뒤꼭지에 대고 다시 한번 데이트(?)를 신청합니다.    

  

“소리 다방? 없어졌잖아?”  

   

아내가 코주름을 쫑긋 세우며 웃습니다. 저 웃는 얼굴엔 아직도 먼 옛날 긴 머리 소녀의 흔적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약간은 남아있습니다.    

  

아내의 말이 맞습니다. 이제 소리 다방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리 다방이 있던 대한극장 옆 건물 지하 공간엔 다방 대신 노래방이 들어와 영업하고 있는지 오래입니다.    

  

“어디든 우리가 가서 앉으면 거기가 다 소리 다방 되는 거 아냐?”  

   

내 말도 맞습니다. 비록 물리적인 공간 개념으로서의 소리 다방은 없어졌을지라도 우리 부부의 추억 속엔 여전히 그 자리에 변함없이 소리 다방이 존재합니다. 소리 다방은 우리 부부의 연애가 시작된 장소이면서, 또 하마터면 영영 헤어질 뻔했던 잊지 못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디야?”  

   

“음. …이디야는 좀 좁으니까. 오늘은 스타벅스.”

    

소리 다방이 오래전 사라진 후 대한극장 근처에 갈 만한 카페라곤 스타벅스 아니면 이디야밖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오케이. 그럼 스타벅스에서 다섯 시.”

    

이렇게 나는 소리 다방 아닌 스타벅스로 아내를 만나러 가고 있습니다.  


         

***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때가 1970년대 초였으니 벌써 오십 년도 훨씬 전의 일입니다. 젊은 사람들 보기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처럼 느껴질 것 같아 글을 쓰면서도 혼자 웃음이 나옵니다.

     

친구들을 만나러 명동 거리로 나갔다가 하얀 얼굴에 단정한 교복 차림의 눈이 맑고 깨끗한 여학생을 처음 만났습니다. 코스모스 백화점 옆의 어느 빵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빵집 안엔 송창식의 노래가 구성진 기타 반주와 함께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꽃보다 귀한 여인”이란 노래였습니다. 나는 그날 들은 노래 가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    


      

누가 그녀를 보았는가.

아무도 모른다네. 나도 모른다네.

사슴을 닮아서 눈이 맑은 그 여자.

혼자서 먼 길 떠나버렸네.    

 

난 그만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꽃보다 더 귀한 나의 여인아.  

   

아무도 모른다네. 나도 모른다네.

하지만 호숫가를 지나가던 바람이

얼핏 보았다고 하더라네.    

 

난 그만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꽃보다 더 귀한 나의 여인아.   

    

난 그만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꽃보다 더 귀한 나의 여인아.


          

***       


    

아내와의 첫 만남은 송창식의 노래 가사처럼 내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열여섯 사춘기 소년의 눈에 우연히 만난 한 소녀의 모습은 사슴을 닮은 듯 눈이 맑은 여인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학생은 내가 만나러 간 같은 반 친구의 사돈처녀였습니다. 그 친구의 누나가 얼마 전 여학생의 오빠와 결혼했고, 그래서 여학생의 오빠는 내 친구의 매형이 되었습니다.  

    

누나와 오빠의 결혼으로 자연스럽게 사돈이 된 두 동갑내기 고딩은 금방 친해졌고, 그날도 서로의 친구들과 어울려 명동 구경을 나왔다가 우연히 나와도 빵집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아내의 첫인상을 사슴을 닮아 눈이 맑은 소녀로 기억하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아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신 처음 볼 때 좀 이상했어. 키만 커다란 남학생이 건방져 보이고, 말도 삐딱하게 함부로 막 하고…”  

   

이게 아내가 본 나의 첫인상이었습니다. 솔직히 이실직고하자면(?) 그건 사실입니다. 아내가 반듯한 모범생의 모습이었다면 나는 한 눈에도 반항심 가득한 문제아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 집안 형편은 최악이었습니다. 공직에 계시다가 옷 벗고 나와 사업을 시작한 아버지는 하는 사업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셨습니다.  

    

얼마나 빚을 많이 지셨는지 하루도 빚쟁이들의 빚 독촉에서 자유로운 날이 없었습니다. 징그럽게도 날마다 빚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기어코 말기 암이라는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셨습니다.  

    

우리 집과는 대조적으로 아내는 부잣집 큰딸로 부족함 없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고슴도치처럼 잔뜩 날 선 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아내는 시종 환하게 밝고 부드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아내는 헤어질 때까지 내겐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도 별 관심 없는 척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짧은 첫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눕자 이상하게 낮에 만났던 여학생의 얼굴이 눈앞에 계속 어른거렸습니다. 친구들과 재재거리던 그 목소리까지 귓전에 왱왱 맴돌았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습니다.


          

***  


            

“야. 잘 지내냐? 나 지금 경주다. 회사 일로 출장 와있다.”

    

1980년대 초의 일입니다.   

   

군에서 전역하고 지금의 SK, 당시의 선경그룹 계열사에 다니고 있던 나는 경주로 출장을 갔다가 포항제철 다니는 친구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야. 반갑다. 혹시 시간 되면 여기 포항에나 잠깐 들렀다 가라.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게”    

 

그 친구가 바로 명동 빵집에서 아내를 처음 만나게 해주었던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마침 출장 업무도 일찍 마친 뒤라 경주까지 내려온 김에 친구 얼굴이나 보고 가자 하고 포항 가는 시외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한참 포항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른아른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녀를 보았는가.

아무도 모른다네. 나도 모른다네.

사슴을 닮아서 눈이 맑은 그 여자.

혼자서 먼 길 떠나버렸네.   

  

난 그만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꽃보다 더 귀한 나의 여인아.

    

아. 버스 안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송창식의 “꽃보다 귀한 여인”이었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방망이질 쳤습니다. 어릴 적 명동의 빵집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포항에 가면, 사슴을 닮아 눈이 맑았던 그 여자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    


      

“대한극장 옆에 소리 다방이란 지하 다방이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 다섯 시에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포항에 내려가자 정말 사슴을 닮아 눈이 맑았던 여인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화기 다이얼을 돌렸고, 기적처럼 만남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토요일에도 오전 근무를 하고 퇴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바쁜 업무가 있어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회사 문을 나서자 약속 시간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퇴계로 진양상가 앞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한꺼번에 몇 계단씩 육교를 뛰어 올라가 건너편 대한극장 앞까지 치달렸습니다. 이미 시간은 다섯 시를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다방 문을 여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어떻게 변했을까? 첫인사는 뭐라고 해야 할까?   


       

***


         

충무로역에서 내렸습니다.

     

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소리 다방이 보일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자리에 소리 다방은 없습니다. 소리 다방은 오로지 우리 부부의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다방입니다.  

    

지하철 운행이 지체되어 벌써 약속 시간인 다섯 시가 조금 지나버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갑니다. 젊을 땐 늦지 않으려고 한걸음에 계단 꼭대기까지 뛰어 올라갔지만, 지금은 숨이 차서 그럴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당신 계단 빨리 올라가지 마. 심장에 무리 가면 큰일 나.” 금방 아내의 잔소리가 들려올 것 같습니다.

     

사십여 년 전의 나는 사슴을 닮아 눈이 맑은 긴 머리 소녀를 만나러 단숨에 몇 계단씩 숨을 헐떡이며 육교 위로 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한 걸음 한 걸음 느릿느릿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저 계단을 다 올라가면 소리 다방 아닌 스타벅스가 나오고, 목사 사모들로 이루어진 합창단 연습을 다 마친 아내가 사십여 년 전의 그날처럼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우리는 여전히 연애 중입니다.    

  

지금 아내를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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