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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란 무엇인가

결국 조금 더 낫게 만드는 무언가

by 파타과니아

기획자란 말이 멋있으면서도 실체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뛰어난 기술이 있거나, 뛰어난 미적 감각이 있는가.


그런데 요즘 일하면서 든 생각은, 기획은 결국 '무언가를 조금 더 낫게 만드는 행위'라는 것이다.


광고 기획자는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광고를 만든다. UIUX기획자는 고객이 쓰기 좀 더 편한 설계를 짠다. 제품 기획자는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생활 곳곳에도 기획이 넘친다. 그리고 잘한 기획은, 고객(상대)을 만족시키고, 더 높은 참여율을 이끌고,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고, 좋은 서비스라는 평가를 듣는다.


1. 일 년 전에 와이즐리에서 상품을 하나 주문했다. 그런데 이사 전 주소를 기입해 잘못 배송됐다. 귀찮게 됐다고 생각하면서 채팅을 걸어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런데 제프라는 상담사가 흔쾌히 "그러면 저희가 이번엔 무료로 수거해 드릴 테니 재주문해주세요"라고 답하는 거 아닌가.


이 무료수거는 단순히 기분 좋은 수준이 아니다. 이 "무료 수거"에는 더 깊은 생각들이 숨어있다.

고객은 귀찮고, 돈 들고, 재주문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고 회사 입장에서는 고객이 잘못한 건데 공짜로 해주신 싫고 만족도는 떨어질 거 같고, 무료수거해 줬는데 얘가 재주문 안 하면 개손해인데..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걸 한 마디로 정리한 거다. 얼떨떨하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재주문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후 와이즐리의 완전한 팬이 돼서 지금까지 비타민, 면도기, 가글, 샴푸 등 그 수거 비용의 100배는 넘는 돈을 쓰고 있다. 와이즐리가 쓴 돈은 5000원도 안 될 거다.


그 감동이 너무 커 아직도 제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와이즐리는 이 분에게 우수사원 상을 줘야 한다.


이건 상담원 수준이 아니다. 이건 CS기획이다.

2. 회사에서 월 2천만 원을 번다는 세차장인 이야기가 나왔다. 그분의 비법은 뭘까. 세차를 마치면, 옆에 주차된 차량의 앞유리도 닦아주고 명함을 꽂아둔다는 거다.


소름이 돋았다. 오늘 내복을 안 입어서가 아니다. 이게 서비스고, 이게 CS, CX 아닌가. 괜히 어른들이 약간 져주듯이 살아라. 먼저 줘야 더 크게 받는다고 한 게 아니다.


3. 판교에 리드링크라는 bar가 있다. 우연한 기회에 방문했는데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처음에 가는 길이 멀고, 주변에 뭐가 없어서 어떤 곳일까 기대감이 낮았는데 안에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스크린에서는 계속 음악에 어울리는 장면들이 나오고, 어둡지만 각각의 자리에는 조명과 트레이가 있어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었다. 북카페라면서 불편하고 시끄러운, 의자가 별로인 곳과는 차원이 달랐다.


감동인 부분이 몇 있었는데, 위스키에 대한 소개를 빼곡히 채워놓은 나무질감 책자였다. 그 바스락거리는 질감과 위스키에 엮인 영화와 문학의 사례는 몇 번을 들춰보게 만들었다. 제프의 무료반품처럼, 아직도 이게 생각난다. 이름만 있는 불친절한 곳을 보다 이런 델 오니, 누구랑 와도 편하게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커피는 시끄러우니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조용한 카페라면서 원두 가는 소리가 나는 곳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생각을 하셨다. 커피만큼 팔기 편하고 쉬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신기했다.

음식도 냄새 안 나고 조리가 간편한 걸로만 준비되어 있었다. 진짜 '책을 읽'기 위한 곳인 거다.


학생 때, 책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포기했다가 이곳을 보고 다시 열망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고 남을 감동시킬만한 공간이라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 작은 공간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열정이 담겨있을까.



예전부터 '이건 이러면 좋겠는데'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기획이었던 거다, 컨설팅이고. 요즘 일을 하면서 고객을 생각하는 마음을 계속 되뇌고 있다. 이걸 감정적으로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 많은 이성적 고민이 들어있을 거다.


위스키책바는 어때야 하지? 조용해야 하지. 커피는? 시끄럽지. 커피는 빼고. 음식도 파스타 이런 건 빼고. 위치는? 간격은? 설명서는? 어떤 책에 어떤 추천사를 적을까? 높이는? 스크린은? 음악채널은?


머리가 깨질 거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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