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를 보고
오준우(유아인)네 집 거실 벽에는 '우리 가족에 평화, 평강, 안녕'이 쓰인 액자가 수호신처럼 걸려있다. 그러나 그의 집은 영화 시작 5분 만에 혼란해진다. 가족 모두가 외출한 집에서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하려는 준우는 긴급 재난 문자와 텔레비전 속보의 습격을 당한다. 그리고 그는 비명을 따라 나간 베란다 아래로 들끓는 좀비 떼를 목격한다. 급속한 전개에 혹시 게임 스트리머인 준우가 접속한 가상 공간인가 싶지만 몽환적인 타이틀 시퀀스를 통과해 다시 들어온 그 집에서 준우는 <마션>(2015)의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처럼 하루 치 식량을 계산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나’때문에 산다
오준우와 또 다른 생존자 김유빈(박신혜)은 재난 영화의 주인공답지 않게 상쾌한 구석이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남으려 한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살아서 다시 보자고 눈물짓는 가족이나 애인이 없다. 영화는 준우의 가족 전부를 좀비가 되거나 죽은 것으로 처리해 준우가 가족 생존의 희망으로 버티는 상황을 불가능하게 하고 그를 완전한 혼자로 만든다. 유빈은 애초에 인간관계를 포함한 신상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부모도 아니기에 죽을 위기의 순간 그들이 스마트폰이나 지갑 속 자녀 사진을 쓰다듬는 축축한 장면은 있을 수 없다. 끝까지 두 사람은 스스로 살고 싶어서 살아 있다.
우리에겐 적응이 최선
재난 영화 주인공들의 생존 전략이 탈출이 아닌 적응이라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준우와 유빈은 닥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쪽이 아닌 지금 상황에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구조를 기다리는 쪽을 선택한다. 두 사람은 난세에 영웅이 될 생각이 없으며 애초에 자신들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옆집 남자가 준우의 집에 침입했을 때 준우는 이 난리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또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냐고 말하는데 그 말은 피해 본 평범한 개인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일 것이다. 가족이 좀비에게 당하는 순간을 전화 너머로 듣게 된 준우가 다 죽일 기세로 집 밖으로 나가지만 막상 좀비들이 다가오자 큰소리만 치고 꽁무니를 빼는 모습 또한 최선의 행동일 것이다.
유빈은 어떤가. 산악 동아리 회원으로 추측되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믿고 집 밖으로 나가는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스킬과 도구를 총동원해 집안을 요새로 구축하고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둔다. 역시 그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또한 이 작고 평범한 개인들은 거대하고 괴이한 재난 상황이라고 해서 우울의 구덩이에만 빠져 있지 않는다. 난생처음 무전기를 써보며 신나 하기도 하고 각자의 집에서 라면을 동시에 끓여 먹는 재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장류진 소설의 인물을 닮았다
<#살아있다>의 준우와 유빈은 인아영 문학평론가가 정의한 ‘오늘날 한국문학의 새로운 얼굴로 평가받는 장류진 소설의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을 떠올리게 한다. 인아영 평론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2019)에 대한 해설 ‘센스의 혁명’에서 이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에 대해 다음처럼 설명한다. ‘감정에 침잠해 있기보다는 가볍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이 개인들은 특별하게 빼어나지도 눈에 띄게 뒤처지지도 않는다. 이들은 대단한 환상을 품게 하는 커리어 우먼이나 거대한 구조와 싸우는 정의로운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도 아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 역시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드론이나 SNS가 아니라 바로 이 두 사람이 <#살아있다>에서 젊고 경쾌한 에너지를 만든다.
이렇게 의심스러워서야
산뜻한 캐릭터들의 등장에도 <#살아있다>는 찝찝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허술한 기본 상황 설정과 느슨하고 편리한 통제는 관객을 자꾸 의아하게 하고 결국엔 영화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한다. 수도와 전기 통신이 정말 끊긴 걸까. 준우네 집에 좀비가 어떻게 들어온 걸까. 냉장고 위치가 원래 저기였나. 20일째 갇힌 것치고는 둘 다 외관이 너무 멀쩡한 거 아닌가 같은 꼬리에 꼬리는 무는 질문들을 자답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애써 높여 놓은 긴장감은 떨어진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극 후반 8층 남자 에피소드는 필요성에 대한 커다란 의문을 남기며 감정적 스크래치만 낸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의 어떠한 충격도 헬리콥터의 구원이 주는 충격을 넘을 수 없다. 살아남은 준우와 유빈은 이제 또 어딘가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아파트에 남아있는 좀비들에겐 관심 없다. 나는 미래의 그들이 궁금하다.
[chaeyooe_cinema]
#살아있다 #ALIVE
감독 조일형
생존해야만 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인 점이 인상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