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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Mar 05. 2020

'1917' 그런다고 전쟁이 끝납니까

<1917>을 보고


<1917>은 1차 대전 중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고 개인적 약속도 지키는 윌리엄 스코필드 일병(조지 매카이)을 영웅으로 떠받들지 않는다. 끝까지 그는 수많은 병사들 중 한 명으로 남는다. 그가 성공했다고 해서 모두의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족사진을 보는 짧은 휴식을 마치면 그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1917년 4월 17일을 살고 있는 그로서는 이 유혈극이 1918년 11월 11일에서야 종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출처 = IMDb <1917>


전쟁은 한 두 사람의 싸움이 아니다

한 프레임에 잡히는 인물이 두 명에서 여럿으로 늘어나는 오프닝 시퀀스는 애초부터 영화가 한두 사람만 꼭 집어 영웅 대접할 생각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맨 처음으로 배치된 스코필드와 톰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가 잔디에서 낮잠을 자는 장면은 이 영화가 두 전우의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좀 더 넓게 본다. 대화하며 걸어가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뒤로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는 병사들의 생활상은 두 사람이 무리 중 몇몇일 뿐이며 전쟁에 얼마나 많은 인생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게 한다.     


<1917>은 인물을 배경의 일부로 두거나 구태여 인물 주변을 따로 잡은 숏을 삽입하는데 모두 스피드와는 거리가 있는 장면이다. 시간과의 싸움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에서 이는 분명 도전이다. 영화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에린모어 장군(콜린 퍼스)의 공격 중단 명령서를 데번셔 연대의 맥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전달하러 출발하자마자 타이머를 누른다.      


두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갑작스레 전령병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곤혹스러움과 시간에 대한 압박감을 즉각 보여줄 법도 하지만 이때에도 카메라는 인물들과 밀착하지 않는다. 그들 각자의 사정이 대화로 전달되는 동안 관객의 눈앞에서는 비좁은 참호를 따라 빽빽이 앉아 있는 병사들과 두 전령병의 전진을 늦추는 들것에 실린 부상자들이 스쳐 지나간다.      


출처 = IMDb <1917>


생자(生者)와 어깨를 부딪치던 영국군 참호 밖으로 나와 사자(死者)가 밟히는 무인 지대로 위치가 변경되면서부터 카메라는 때때로 죽은 것들을 들여다보느라 이동을 멈춘다. 이를테면 내장이 튀어나왔거나 가시철사에 걸린 시체, 말의 사체, 나뒹구는 해골이 카메라의 관심 대상이다. 스코필드가 위로 올라가면서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가도 카메라는 주인공을 뒤따라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진흙더미 속에 파묻힌 손에 집중한다. 후반부에 카메라는 스코필드가 댐에서 강둑으로 빠져나올 때 그가 밟고 지나간 엉킨 시체들을 비추면서 한 번 더 외도한다. 원래 전쟁은 핏기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냉철한 숏이다.           


출처 = IMDb <1917>


고생길은 예견된 일

스코필드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 촬영상, 음향믹싱상, 시각상 수상작의 주인공으로서 마땅한 산전수전을 겪는다. 진보된 기술력을 갖춘 영화는 전쟁의 현장과 지리적 환경을 실감하게 구현한 장소들로 그를 계속 이동시킨다.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지하로 내려갔다가 지상으로 올라오도록 짜인 그의 동선은 시각적 대비를 이루어 공간감을 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무인지대에서 가시철사에 손바닥을 찔리는 흉조를 겪은 스코필드는 독일군 대피호 안에서는 부비트랩 폭발로 실명될 뻔한다. 블레이크를 떠나보내고 홀로 도착한 에쿠스트에서는 낙상으로 한동안 정신을 잃고 총격을 피해 전력 질주하며 폭포에서 떨어져 익사의 위험에까지 처한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그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생존 미션은 심플한 서사를 보충한다.      


출처 = IMDb <1917>


당신, 정말 거기 있나요?

<1917>은 분명 시들시들한 관람이 어려운 영화다. 사운드는 심박수를 높이고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이 담은 장면은 눈을 크게 뜨게 해 좀처럼 좌석 등받이에 등을 댈 수가 없다. 어느새 스코필드의 보이지 않는 전우가 되어 그의 여정에 동참한 관객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몰입하면서도 나는 이따금 스코필드가 정말 전장에 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났다. 젠틀하게 수고했다고 말하며 소품 총을 반납하는 조지 매카이의 모습도 함께 상상했다. 일병 스코필드가 거대한 하나의 땅덩어리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 스코필드가 인공적인 개별 스테이지 하나하나를 클리어하고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그런 딴생각이 들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1917>


<1917>은 눈을 감은 채 햇살을 느끼고 있는 스코필드의 얼굴에서 끝이 난다. 내내 전쟁터를 누비던 카메라가 종착지로 인간의 얼굴을 선택한 것이 내게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스코필드가 눈을 감고 있던 오프닝과의 통일성을 고려한 결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늦게나마 평온한 그의 표정을 보게 되어 기뻤지만 이 영화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는 글귀가 쓰인 가족사진을 품고 다니는 인간에게 정말 관심이 있는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chaeyooe_cinema]

1917

감독 샘 멘데스 Sam Mendes


당신이 임무를 완수하고 약속을 지킨다면, 모두의 전쟁은 끝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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