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보고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김인남(황정민)의 딸 유민(박소이)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백두산>(2019)에서 리준평(이병헌)의 딸 순옥(김시아)과 자매처럼 닮았다. 두 아이는 고생으로 배싹 마르고 가여운 몰골로 각자의 아버지에게 발견됨으로써 그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여기에 딸들이 표정이 없고 실어 상태라는 설정은 부성애를 달구고 마침내 그들을 자식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영웅적 아버지로 완성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납치되어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는 유민을 중간중간 보여 주는데, 이 장면들은 유민의 심경을 표현하는 데에는 무관심하며 마치 인남이 찾아갈 다음 장소를 관객에게 예고하기 위해 삽입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작부터 김인남이 아버지였던 건 아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킬러인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9살 난 딸이 있으며 그 아이가 현재 태국 방콕에서 실종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손을 씻고 파나마에서 새 인생을 살 계획이었던 그는 딸 먼저 찾기 위해 방콕으로 날아간다. 김인남이 알게 된 사실은 이것 말고 하나 더 있었는데, 고레다 다이스케란 남자를 처리했던 자신을 다이스케의 남동생인 킬러 레이(이정재)가 혈안이 되어 쫓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단순하고 익숙한 서사를 세공하지 않고 썼음에도 수려하고 정교한 촬영의 은덕으로 비판의 화살을 피해 간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찍은 땅거미가 진 인천의 밤 풍경은 그의 전작인 <곡성>(2016)의 새벽녘과 <버닝>(2018)의 해 질 녘만큼이나 강렬해서 결국 또 아버지 이야기라고 투덜대는 일을 잠시 멈추게 한다. 왕가위 감독의 멜로 속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빛이 칼처럼 베고 간 인남과 레이의 그늘진 얼굴은 두 남자의 서사에 희생된 유민의 얼굴을 잠시 잊게 한다. 무엇보다 핸드헬드와 스톱 모션의 결합으로 완성된 거세고 리듬감이 좋은 액션 시퀀스는 이 추격전이 왜 이토록 피비린내가 나야 하는지 따져볼 타이밍을 놓치게 한다.
극 후반 유민은 아동 장기 매매 조직의 수술대에서 인남에게 가까스로 구출되지만 영화가 아이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지 않기 때문에 그 뒤로도 유령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인남의 손을 잡은 유민은 납치하려는 보모 손에 이끌렸을 때와 매매 조직원에게 들려 안겨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동요가 없다. 새 원피스를 사 입히고 인형을 손에 쥐여 주는 인남의 아빠 노릇을 아이는 거부 한번 없이 받는다. 사건 이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커 말을 못 하게 된 것으로 처리된 유민이 자기 의지로 하는 유일한 행동은 절대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하는 인남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는 것이다.
유민을 줄곧 인남을 움직이도록 하는 데에 활용한 영화는 마지막 액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위해 전보다 더한 방식으로 유민을 쓴다. 부녀가 은신한 호텔 방을 급습한 레이가 유민을 캐리어에 가둬 자기 차에 싣고 가자 인남은 딸을 구하기 위해 레이의 차로 몸을 날린다. 영화는 두 남자가 차 안에서 최후의 한판을 벌이는 와중에 저 뒤에서 요동치는 캐리어를 카메라로 잡아 관객에게 보여 주곤 하는데, 이 광경은 영화가 혹시 저 캐리어를 정말 가방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묻고 싶게 한다. 저 안에 아이가 있다. 그 점을 구태여 상기한다면 언급한 장면은 영화 속 어떤 신체 훼손 장면보다도 잔인하고 공포스럽다.
죽어가는 아버지가 캐리어를 열었을 때도 조력자 유이(박정민)의 품에 안겨 폭발한 차에서 멀어질 때도 유민은 여전히 말 없는 인형이다. 유민은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 한 남자를 살고 싶게 만든 무엇이며 아버지가 목숨 바쳐 살려낸 딸이라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파나마에 도착한 유민과 유이가 집 앞 해변에서 노는 장면은 집 안의 누군가가 그들을 바라보는 듯이 찍혔다. 아마도 그 따스한 시선의 주인은 곁에서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유민의 아버지일 것이다.
[chaeyooe_cinema]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DELIVER US FROM EVIL
감독 홍원찬
어둠이 걷히고 땀이 식으면 분명해지는 공허함과 무신경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