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리키>를 보고
<미안해요, 리키>를 보는 동안 안전한 느낌을 주어야 가족이라던 김보라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리키네 가족 중 딸인 리사 제인 터너(케이티 프록터)에게 감정 이입했기 때문이다. 리사의 가족은 리사를 불안하게 만든다. 아빠가 일을 새로 시작한 뒤부터 아빠 엄마는 말 붙일 수 없을 만큼 더 피곤해 보이며 그 와중에 오빠는 자꾸 사고를 쳐 집안에서 큰 소리가 나게 한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있음을 어린 딸은 모를 거라고 부모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찍부터 착한 아이 역할을 하며 철든 아홉 살에게 우리 집은 이미 공포다. 결국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인물에게 행복을 선물할 법도 하지만 켄 로치 감독은 역시나 너그러운 산타가 못 된다.
부모의 시간, 자식의 시간
많은 일하는 부모가 그렇듯 리사의 부모 역시 하루의 대부분을 집 밖에서 보내는데 이들의 노동 시간은 초월적이다. 생활 택배 기사(Lifestyle Couriers)인 아빠 리키 터너(크리스 히친)는 주 6일 매일 14시간씩을, 방문 간병인인 엄마 애비 터너(데비 허니우드)는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일한다. 오래 일한다고 해서 그들에게만 24시간 이상이 주어질리 없다.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식과 함께 할 시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영화는 터너 부부가 각자의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그 시간은 곧 리사가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지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걱정시키지 않는 아이가 걱정된다
그래서 리사는 걱정시키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출근한 엄마가 버스 안이나 길 위에서 짬짬이 하는 전화나 문자를 무시하지 않고 파스타를 챙겨 먹고 숙제를 한다. 아침에는 학교를 자꾸 빠져 부모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오빠 셉(리스 스톤)의 이불을 뺏어 학교에 가라고 재촉도 한다.
집에 돌아온 부모님에게 막내답게 모자란 관심을 요구할 법도 하지만 리사는 보채지 않는다. 들어줄 여력이 부모님에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눌어붙은 파스타 면처럼 소파에 앉아 잠든 엄마 아빠가 깨지 않도록 가만가만 저녁 접시를 치운다.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자란 아이는 늘 조마조마하며 마음이 작아지기 쉽다. 자신을 짐이라고 여기고 부담되지 않을 방법부터 찾는다. 착한 딸이고자 애쓰는 리사가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던 이유다.
싸움의 제삼자가 아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리사를 겁먹게 한다. 집안 공기가 얼어붙는 순간을 놀랍도록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는 공포의 촉수를 아이들은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 리사는 물건을 훔치다 잡힌 오빠의 핸드폰을 압수하려는 아빠와 그걸 막으려고 하는 오빠가 몸싸움을 벌이자 부리나케 달려온다. 부모의 침실에서 큰 소리가 새어 나오자 방문을 두드리고 싸우지 말라는 주의를 준다. 공포로 빠르게 뛰는 리사의 심장 소리는 이 영화의 들리지 않는 효과음이다. 아빠와 오빠의 싸움을 목격한 그날 밤 리사는 몸을 떨고 오줌을 싼다. 직접 부딪히는 세 사람에게 가려졌을 뿐 리사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
그 후로도 그들은 행복하게 살지 못했답니다
후반부에 이르면 안전하지 못한 아빠는 리사에게 모든 걸 잡아먹는 불안 덩어리가 된다. 리키는 근무 도중 택배 물품을 노린 일당에게 심각한 폭행을 당했음에도 다음날 새벽에 일을 하러 가족 몰래 차에 오른다. 그는 갈취당한 택배 물품과 부서진 바코드 스캐너의 값 전부를 물어내야 하고 대체 기사도 알아서 구해야 하는 고용법상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긱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놀라 뛰쳐나온 리사는 오빠와 엄마와 함께 눈이 부어 앞도 잘 못 보는 차 안의 아빠를 말리지만 소용없다. 영화는 울며 운전하는 리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집 앞 거리에 있다. 그곳에 리사가 서 있다. 절망한 아이에게 앞으로는 행복해질 거라는 거짓말을 나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chaeyooe_cinema]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감독 켄 로치 Ken Loach
긱 노동자의 불안한 우리 집. 그 후로도 그들은 행복하게 살지 못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