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분자>(1986)를 보고
작가 만들기
에드워드 양의 1986년 작 <공포분자>에서 소설 쓰는 여자 주울분(무건인)은 책상 위 종이와 펜 대신 담배에 손을 댄다. 더는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가진 걸 다 써버린 것 같은 공포감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써놓았던 원고마저 파지로 만든다. 그러나 주울분의 가슴속에 이는 회오리바람을 알지 못하는 의사 남편 이립중(이립군)은 소설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애쓰냐며 숙고 없이 아내를 격려한다. 주울분이 의문의 전화 한 통을 받기까지 관객이 보는 그의 얼굴은 빈 종이와 같다. 2020년의 나는 커서가 깜박거리는 빈 문서 창의 공포 속에서 살지만 그렇다고 백지의 공포를 모르는 건 아니다. 주울분과 같은 얼굴이 종종 되는 나로서는 이 영화가 주울분 한 사람의 이야기로 간명해졌다.
사실 주울분이 쓸 것을 완전히 소진한 건 아니다. 기혼자인 그에겐 부부 얘기가 남았다. 그러나 그가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허망해하는 건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것마저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진진하지 않다고 체감하기 때문이다. 창작자로서 이야깃거리가 없는 삶을 사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재능 없음에 좌절한 주울분은 회사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하지만 영화는 자신의 주인공에게 일대의 기회를 준다.
추정하건대 남편과 불륜 관계인 여자가 만나자고 걸어온 전화를 받은 주울분은 약속 장소인 어느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오면서 그는 당혹해한다. 그러나 카메라가 잡은 그의 얼굴 정면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감정은 뜻밖에도 매혹이다. 무언가에 매혹당한 것이 분명한 얼굴은 주울분에게 이야깃거리가 생겼음을 신호한다.
비로소 그는 다시 쓴다. 평범한 부부 얘기에 이날의 에피소드를 녹여 소설 ‘결혼실록’을 완성한 주울분은 이 작품이 올해의 소설로 선정되면서 전업 소설가가 된다. 머지않아 그날의 전화가 외출을 금지당한 이름 모를 소녀(왕안)의 장난 전화였다는 게 밝혀지지만 그렇다고 주울분이 안도한다거나 가정에 평화가 찾아온다거나 하지 않는다. 바랐던 건 무료한 일상의 파괴였기에 진실은 주울분의 마음속에 파문 없이 그대로 가라앉는다.
서로에게 명중하지 않는 부부의 시선
무미건조한 이립중과 주울분의 관계는 3분 진료하는 의사와 약만 타러 온 환자 사이를 연상케 한다. 이립중은 폭력적인 기운이 없고 집에 들어오면 손부터 씻는 드물게 귀한 남자이지만 실은 아내에게 무관심하여 아내의 지속적인 우울감이 유산 때문이라고 넘겨짚는다. 그는 갑작스레 공석이 된 과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결정권자 앞에서 경쟁자인 동료를 넌지시 모함하기까지 한다. 승진에 대한 그의 과욕은 자신의 성공이 아내에게 안정을 되찾아줄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한다.
아내에게 내일이면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말을 건네고 집을 나가겠다는 아내의 닫히지 않은 짐 가방을 꾹꾹 눌러 닫아주는 이립중의 행동이 사려의 결과로 보이지 않는 건 주울분의 무표정 때문이다. 불편한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려는 남편이 익숙하다는 듯 그는 우두커니 남편 곁에 서 있다. 주울분이 다시 만난 옛 연인 심 씨와 침대에 있는 장면에서 주울분은 관계를 염려하는 심씨에게 어차피 남편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기에 의심도 않는다고 답한다. 체념한 어조는 그가 남편의 애정을 갈구하는 시기를 이미 지났음을 알게 한다.
한집에 사는 부부는 좀처럼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고 그럴 기회가 생겨도 주울분과 이립중이 시선을 교환하는 경우는 드물다. 거실 식탁에 마주 앉아 말다툼하는 시간조차 부엌에서 들리는 물 끓는 소리에 의해 중단된다. 이때 부엌으로 이동한 배우 무건인이 갑작스레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봄으로써 주울분의 대화 상대는 남편에서 관객으로 변경된다. 아이 콘택트를 요구하는 영화 속 인물의 돌발 행동에 관객이 눈동자를 굴리는 것도 잠시, 주울분이 직접 밝히는 속마음은 그와 눈을 맞추게끔 한다. 삶을 새롭게 해 줄 줄 알았던 결혼이 되레 지루한 일상을 연장했다고 하소연하는 여자의 낙담한 표정을 거실의 남자는 볼 수가 없다.
[chaeyooe_cinema]
공포분자 恐怖分子 / The Terroriser
감독 에드워드 양 楊德昌 / Edward Yang
빛이 부재한 곳에 숨은 사람들과 빛이 드는 곳에서 창밖만 기웃거리는 사람들 모두 어둠 속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