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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Oct 29. 2020

‘삼토반’의 여직원들은 집도 애인도 걱정하지 않는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고


세계화란 말이 대통령 신년사에 등장한 1995년, 대기업 삼진전자의 상고 출신 8년 차 여성 사원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은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나머지 사생활이 궁금한 캐릭터들이다. 이를테면 일 잘하는 이자영이 주말에는 뭐 하고 노는지, 패셔니스타이자 추리소설 마니아인 정유나가 어디로 옷 쇼핑을 하러 다니고 서점에서 어떤 작가의 추리소설을 집어 드는지,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심보람이 테트리스 말고 또 어떤 수학적 놀이를 즐기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일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에는 별 관심이 없다. 세 명의 인물은 끝까지 회사원이라는 한 가지 사회적 역할만 수행하며 영화는 그들이 그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를테면 극 중에서 이자영, 정유나, 심보람이 딸이나 애인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토익 600점 이상을 받아 대리 승진 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토익반에 다니고, 틈틈이 회사가 저지른 공업 폐수 유출 비리도 파헤치느라 안 그래도 바쁜 주인공들에게 가족 서사와 로맨스 서사를 붙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그 흔한 시집이나 가라는 엄마의 잔소리나 집 앞에서 기다리는 애인의 모습을 듣고 보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관객에게 제공되는 세 사람의 개인적인 정보도 거의 없다. 부모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언니나 오빠 아니면 동생이 있는지, 혹시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지 알게 뭐냐는 식이다. 심보람의 가족이 등장하는 아버지 장례식 장면이 있긴 하지만 이 장면은 조문 온 봉현철 부장(김종수)과 심보람 사이의 각별했던 동료 관계를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삼진의 어떤 남자 직원도 세 여자와 로맨틱 혹은 에로틱한 분위기로 얽히지 않는다. 특히 이자영과 가까운 젊은 남자 동료라는 점에서 최동수 대리(조현철)는 은근슬쩍 로맨틱한 상황을 조성하기에 적당한 캐릭터지만 그는 끝까지 이자영에게 별 볼 일 없는 동료로 남는다.


가족 서사와 로맨스 서사라는 걸림돌을 치움으로써 주인공들은 가족과 애인을 걱정하는 대신 회사와 자기 자신만 걱정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옥상과 주점과 국숫집에 모여 안주 삼아 하는 이야기는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한 관계자 수색과 내부 고발에 대한 두려움과 용기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며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가령 개발하고 싶은 제품과 바꾸고 싶은 전산 시스템 같은 것으로 나아간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언급하되 재현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회계부인 심보람이 직원들의 룸살롱 비용을 영수증 처리한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은 있지만 룸살롱에서 먹고 마시는 장면은 없다. 마케팅부인 정유나가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시절 자신을 성희롱한 전무를 고발했다고 말하는 장면은 있지만 정유나가 성희롱을 당하는 과거 장면은 없다. 더러운 현실을 보여주겠다는 명목으로 영화에 쉽게 삽입되곤 하는 자극적인 장면들을 이 영화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확보한 시간을 주인공들의 직장 생활과 비밀 수사를 꼼꼼히 따라가는 데에 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여러 답답한 상황은 영화가 씨앗처럼 품은 명랑하고 선한 에너지로 인해 어두운 기색이 없다. 그런데도 젊고 똑똑한 도로시(이자영)와 미셸(정유나)과 실비아(심보람)가 회사에서 때때로 누구누구 씨가 아니라 미스 누구로 아가씨로 불려서, 그들이 종일 입고 있는 그 옷이 도무지 멋이라고는 없는 흰색 칼라 셔츠에 불그죽죽한 유니폼이라서, 그들이 열심히 하는 그 업무가 도무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커피를 타서 돌리고 닦은 구두를 배달하고 단순 계산을 반복하는 일이라서, 영화가 그것에 대해 유난을 떨지 않는데도 보는 사람의 가슴은 미어진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따금 촉촉해지는 눈가를 말려줄 산뜻한 바람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내내 분다. 그것은 굳이 보여주지 않는 영화의 태도가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이 기분 좋은 바람은 여성 인물들이 전진할 수 있도록 그들의 등을 힘껏 밀어준다. 거기에 이런 지원의 말을 보태고 싶다.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     




[chaeyooe_cinema]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SAMJIN COMPANY ENGLISH CLASS

감독 이종필




집 걱정, 애인 걱정하지 않는
여직원들 이야기.
영화는 산뜻한 바람으로
캐릭터들의 등을 힘껏 밀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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